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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만드는 미래 위키토피아(Wikitopia)
위키토피아는 ‘위키wiki’와 ‘토포스topos’를 붙여서 저희가 새로이 만든 말입니다. 글자 그대로 ‘모두가 함께 만드는 유토피아’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곳에 연재하는 글들은 우리 모두가 이 위키토피아의 건설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할 뿐만 아니라 나서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열기를 불어넣기 위한 글들입니다. 인류 진화사에서 산업 문명이 차지하는 위치가 무엇인가와 같은 거시적인 주제로부터 대한민국의 출산율 정책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와 같은 구체적인 주제들까지, 현미경과 망원경을 모두 동원하여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제목 2012년의 우리, 2019년의 우리, 2030년의 우리
작성일자 2019-04-11

2012년의 우리, 2019년의 우리, 2030년의 우리



이 연재를 접하신 분들은 두 가지 점에서 당혹스러우실 수 있습니다. 첫째, 이 연재의 글들에서 사용되는 “우리”란 도대체 누구냐? 홍기빈의 위키토피아라고 했으면 “나”라고 해야 하는 게 아니냐? 둘째, 난데없이 지금 왜 갑자기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뛰쳐나오는 것이냐? 이 두 질문은 사실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연재의 글을 통하여 생각을 전개하는 이들이 어떤 이들이고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살아오고 어떤 고민을 해온 이들인지를 모르는 상태에서는 지금 이런 이야기를 갑자기 꺼내드는 맥락을 파악하기가 난감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우리”가 짧게는 지난 7년, 길게는 지난 25년간 어떤 생각과 고민을 해왔는지를 말씀드리는 것이 온당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비록 한참 모자라고 어줍지 않은 고민이지만, 25년간의 저희의 고민의 내용을 이 짧은 글에 담는 것은 지난한 일입니다. 다행히도 2012년의 시점에서 이를 압축적으로 짧게 담아낸 글이 있으니, 2019년의 지금이라는 시점에서 이 글을 돌아보며 설명을 덧붙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2030년을 내다보면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무슨 연판장마냥 명단을 대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만 (그리고 그렇게 명단을 댈 만큼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지만), 이 “지식공유지대”를 준비하고 열고 내용을 채워나가는 일은 저 혼자가 아니라 이 작업의 의미와 취지에 공감하고 힘을 모은 여러 사람들의 공동 작업이었습니다. 그 분들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 동력이 되고 계신 분이 (재)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의 박형준 소장님이며, 또 지난 25년간 저와 꾸준히 토론과 공동 작업을 통하여 견해와 관점을 공유한 분입니다. 박소장님이 2013년에 출간한 저서 [재벌, 한국을 지배하는 초국적 자본]의 (이 책의 PDF 파일은 이 “지식공유지대”에서 내려 받을 수 있습니다) 서문은 박근혜 후보가 승리했던 2012년 대통령 선거 직후에 집필된 글로서, 당시 2012년을 기점으로 그 전 20년 그리고 그 후 20년을 어떻게 조망해야 하는지에 대한 “저희들”의 생각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그 글을 2019년의 지금 시점에서 찬찬히 다시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2012년 진보 진영의 선거 패배는 우리 사회에 관해 보다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고민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선거 전략상의 ‘실수’가 아니라, 87년 이후 지금까지 급변해온 사회현실에 민주당을 비롯한 진보정당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결과였다. 그들은 시대에 맞지 않는 자신들의 정치 프레임 속으로 대중들을 밀어 넣으려고만 했다.



통합민주당과 새누리당은 (이름을 여러 차례 바꾸긴 했지만) 진보와 보수 양대 진영을 대변하며 지난 25년 동안 사생결단하듯 선거를 치러왔다. 하지만 싸움의 형식은 치열했으나 싸움의 내용은 명확하지 않았다. 보수 쪽의 지향이 뚜렷했던 데 반해 진보정치 세력은 자기를 주체적으로 정의하는 데 실패했다. 계속해서 보수집권 체제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자기를 표현했을 뿐이다. 말하자면, 반노태우, 반김영삼, 반MB라는 네거티브 프레임을 통해 보수 세력이 집권하면 안 되는 이유만을 부각시켰지, 정작 진보 세력이 집권해야 할 이유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진 못했다. 민주당은 이 프레임을 이용해 10년 동안 집권했지만, 막상 권력을 잡았을 때 보수 정권과의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2007년 대통령 선거 때 63퍼센트라는 낮은 투표율과 민주당 정동영 후보가 얻은 26퍼센트라는 저조한 득표율은 노무현 정부가 원인을 제공한 정치적 냉소의 표현이었다.



민주당의 정치적 한계를 지적하며, 독자 정당 운동을 펼쳤던 좌파정당들도 자기를 정립하는 데 실패했다. 민주노동당으로 시작된 좌파 진보정당 운동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밝히고, 민주당이 표방하는 것보다는 좀 더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을 주창해왔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1980년대 형성된 사상의 프레임을 탈피하지 못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소위 NL과 PD의 대립 구도에서 분열을 거듭하며 쇠락을 자초했다.”



“나는 A가 아니다”라는 언명은 “나”라는 존재의 내용과 정체성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확립하는 작업에 심한 장애물이 됩니다. A가 변함에 따라 A가 아닌 “나”라는 존재도 계속 변해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 내용도 없이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속절없이 변해가는 한심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계속 내용을 생산해내면서 혁신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주체인 A의 변화에서 파생된 부산물 더 심하게 말하면 기생적 존재의 정체성일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범 진보 진영의 여러 정치 세력에게 너무나 아프게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87년 대통령 선거 아니 그 이전인 50년대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2017년의 대통령 선거에 이르기까지 (더불어)민주당과 그 전신인 여러 정당들의 구호는 오로지 정권교체 즉 “갈아보자”였을 뿐입니다. 정치 세력은 지금의 사회를 어떻게 개혁하여 중장기적으로 어떤 미래를 만들어 나갈 것인지에 대한 분명하고도 일관된 계획을 가지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이루어나갈 수 있는 인적 자원, 로드맵, 대중 동원력 등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70년 역사에서 그러한 정치 세력은 “조국 근대화”와 “시장 자본주의”를 내걸었던 보수 세력뿐입니다. (더불어)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세력은 항상 “우리는 A가 아니다”라는 것 이외의 다른 내용을 제대로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이는 진보정당을 내걸었던 민주노동당 이후의 여러 정당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는 B가 아니다” 즉 “우리는 (더불어) 민주당이 아니다”라는 것 말고 독자적인 한국 사회의 미래 비전과 전략을 제대로 제시한 적은 없었습니다.  



2.

“그러나 박근혜 후보의 당선이 역사의 후퇴를 의미하진 않는다고 믿는다. 진보건 보수건, 좌파건 우파건 시대정신을 넘어서는 정치를 할 순 없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의 표현을 빌리자면, 박근혜 정부의 정책들도 “가능성의 한계the limits of the possible”에 규정당할 것이다. 돌이켜 보면, 광주에서 학살을 자행했던 전두환 정권이 1987년 6월에 다시 한 번 유혈 진압을 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집단이지만, 시대의 요구를 거스를 순 없었던 것이다. 1987년 대선에서 쿠데타 주도자 중 하나인 노태우가 당선해 ‘군부’ 재집권에 성공했지만, 이후 전두환을 백담사로 보내야만 했고, 민주화라는 시대의 ‘정언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박근혜 당선의 가장 유력한 배경인 박정희의 조국 근대화 성공담도, 엄밀한 평가는 잠시 보류하고 말하면, 당시 시대정신에 부합한 결과였다. 군사독재 정권이 주도하지 않았더라도 근대화란 화두가 우리 사회를 지배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종결자’ 역할을 할 것 같았던 MB 정부도 2008년 세계 금융공황으로 인해 뜻대로 하지 못하고, 나중에는 결국 ‘재벌 기업에 좋은 것이 대한민국에 좋은 것’이라는 정책기조에서 물러나 형식적이나마 동반성장위원회를 만들어야 했다. MB 정부가 자본시장통합법을 기초로 삼아 역점을 두고 추진하려 했던 글로벌 메가 뱅크나 거대 투자은행 설립, 헤지펀드 활성화 방안도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2011년 자본시장통합법 개정안을 내놓으면서 금융화 확대 프로젝트를 재가동하려고 했지만, 법안은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가 박근혜 정부에 들어와서 겨우 통과되었다. 4대강 사업은 막무가내로 완수했지만, 신자유주의보다는 개발독재 프레임에 더 가까웠다.”



정치라는 드라마는 여러 정치 세력이 스스로 품고 있는 이상이나 야망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세력들이 명멸하는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에서 그 사회가 처한 객관적 상황과 조건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풀어야만 하는 시대적 과제가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 관념적인 습관을 가진 독일인들은 “시대정신Zeitgeist”이라는 신비화된 언어로 지칭했습니다만, 정치라는 야수적 현실을 직시할 줄 알았던 이탈리아인들은 이를 다른 용어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마키아벨리의 “필요necessità”, 그람시의 “국민적-대중적 요구” 등). 이것이 그 여러 정치 세력들에게 “가능성의 한계”가 됩니다. 제 아무리 좌파적 혹은 우파적 이상에 충만한 세력이라 하더라도, 그 시대가 그 사회에 요구하는 구체적인 과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음을 입증할 때에만 집권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세력은 자신들의 주관적인 이상과 꿈을 그 객관적 조건과 과제에 맞추어 수정하고 변형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물결이 거셌던 2000년대 초에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만이 아니라 설령 사회민주당이 집권을 했다고 해도 “제 3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실업과 불평등의 문제가 심화되어 경제 민주화와 복지 강화의 시대적 요구가 나타난 2010년대에는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라 해도 그 요구에 어느 정도 부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2019년에는 어떨까요? 산업 구조와 기술 패러다임의 변화의 물결은 더욱 물살이 빨라졌습니다.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회 혁신의 지체로 인해 곳곳에서 사람들의 고통과 비효율의 적체가 더욱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출산율 저하, 인구 감소, 기대 수명 증가 등이 가져올 사회적 충격을 어떻게 소화할지의 문제는 더욱 절실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일, 여가, 삶, 사회, 산업, 정치, 행복, 공동체, 생태, 인생의 가치 등과 같은 말들이 무슨 뜻이며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지의 질문들은 점점 더 절박해지고 있습니다. 2030년을 준비하는 2020년대의 정치 세력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 땜빵식의 알량한 대증요법을 나열할 것이 아니라, 이 문제들을 아울러서 해결할 수 있는 포괄적이고도 전체적인 사회 개혁의 비전과 계획을 가지고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는 세력은 모조리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3.

“박근혜 정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우리 시대의 요구에 제한당할 것이다. 한국 사회의 미래 진로가 어디로 나아갈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위의 삽화에 몇 가지 적어 놓았듯이, 산적한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피해갈 수 있는 우회로는 없다. 삽화에 담긴 비유로 표현하자면, 박근혜는 소닉붐 직전의 비행기 조종사가 된 것이다. 소닉붐은 비행기가 음속을 돌파할 때 생기는 충격파로 인해 생기는 굉음을 가리킨다. 속도가 높아지면서 비행기 기수에 여러 겹의 공기층이 쌓이면서 엄청난 압력을 발생시키는데, 비행기가 이를 뚫고 나갈 때 강한 파장이 발생한다. 박근혜 정부가 몰고 갈 ‘주식회사 대한민국호’ 앞에는 박정희 정권 때의 개발독재가 남겨놓은 역사적 잔재부터, 2008년 세계 금융공황을 계기로 시작된 신자유주의 체제 붕괴와 장기불황, 재벌 기업들의 독점적 권력 축적과 그로 인한 경제 양극화, 비정규직 증가·청년 실업에 의한 삶의 불안정화 등 온갖 난제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박근혜 정부의 선택지는 둘 중에 하나다. 어떤 묘수를 찾아내 소닉붐을 일으키며 난관을 뚫고 나가든지, 아니면 뭉기적대다가 추락하든지.



민주화 25돌을 맞은 해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가 보수 진영의 승리로 끝났지만, 시대의 화두가 보수적일 것 같진 않다. 박근혜 개인이나 박근혜 정부가 이른바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움)’ 기조를 버리고 ‘좌클릭’하진 않겠지만, 현재의 국내외 상황을 무시하고 그 길을 고집할 수는 없다. 이미 대선 전부터 새누리당은 위에서 열거한 사회경제적 문제점들을 인정하고,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담론을 받아들여야 했다. 새누리당은 대선이 끝나자마자 공약 수정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기만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경제민주화와 복지확대라는 큰 틀 자체를 없던 일로 할 순 없을 것이다.”



이 소닉붐을 뚫지 못한 (혹은 않은) 최순실-박근혜 정권은 결국 “뭉기적대다가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희가 2012년 시점에서 감히 미래가 어떻게 될지를 꿰뚫어 보는 제갈량의 기문둔갑술과 같은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씀드린 바, 모든 정치 세력을 제약하는 객관적 시대적 과제라는 것은 도망갈 도리가 없다는 것만큼은 오히려 기문둔갑술보다 더욱 분명하게 인간 세상을 구속하는 법칙임이 분명합니다. 촛불 집회는 직접적으로는 최순실 등의 엽기적 비선 실세가 드러난 것에 있었지만, 그 사회적 배경이 박근혜 집권 기간 동안에 지체된 사회경제적 개혁의 지체가 자아낸 사회 전체의 “불만discontents”에 있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분명히 박근혜 정권 또한 시대의 요구에 맞추어 복지강화, 조세 기반 강화, 경제 민주화 등의 방향으로 무언가 하려는 제스처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위 그림에서 제트기가 만나게 되는 소닉붐은 결코 “제스처” 따위로 뚫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명확하고 논리적이면서도 현실적인 플랜도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하늘이 무너져도 그러한 플랜을 실행하겠다는 굳은 결기를 가진 인물들이 결집해야 하고, 대중들에게 이를 설득하여 반대 세력의 저항을 뚫고 나갈 정치적 역량과 정열도 있어야 합니다. 박근혜 정권은 이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소닉붐을 뚫지 못한 비행기에게 남은 선택지는 추락뿐입니다.



4.

“싸움은 끝나지 않았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우리는 지금 지난 반세기 동안 형성된 이른바 선성장·후분배 원칙에 기초한 사회 변화의 경로를 수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다. 진보 진영이 이번 대선에서 패배한 것은 애석한 일이지만, 협소하게 선거결과 분석에 몰두하기보다는 이러한 기회를 살려 새로운 사회적 경로를 열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는 화두를 붙들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대선에서 진보 진영이 새누리당의 재집권을 막아야 한다는 과제에 공감해 다함께 뭉치기는 했지만, 진보정치 세력은 새로운 사회적 전망이나 기존 경로의 변경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했다.



민주당은 지난 25년 동안 일종의 ‘대안 부재론’, 즉 자신들 말고는 집권 능력이 있는 대안 야당이 없다는 현실을 이용해 진보 성향의 대중들을 볼모로 잡는 정치를 펼쳐 왔다. 진보적인 사회경제 체제에 대한 고민 없이 ‘민주 대 반민주’ 구도로 선거 이벤트에만 몰두하다 막상 집권하자, 신자유주의 체제 확립을 주도했다. 지금 한국 사회를 질식시키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 가계 대출 팽창을 통한 부동산 거품 형성, 무분별한 자유무역협정의 확대 등이 모두 민주당 집권기에 심화되었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이번 대선에서 통렬한 자기반성 없이 구태의연한 진영논리에 기대려고 했다. 이 구도를 탈피하려는 대중의 움직임이 소위 안철수 현상으로 물화되어 나타났지만, 정작 안철수는 이런  변화의 염원을 실현할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물론 안철수 현상이 용두사미가 된 이유는 안철수 개인의 한계 때문이라기보다는 진보 진영 전체가 대안적 사회경제 체제에 대한 내용을 아직 준비하지 못한 탓이다.”



정치경제학에서 쓰이는 용어로 “경로의존path-dependency”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나라마다 독특한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과 유산이 있는지라 산업화 과정이 모두 다를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해서 생겨난 독특한 그 나라 고유의 자본주의 모델은 추후에도 그 사회의 자본주의가 발전해 나가는 경로를 심하게 제약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주지하듯이 1960년대 이래 반세기가 넘는 동안 한국 자본주의는 재벌 대기업들이 주도하는 수출을 통한 성장과 부동산 가격 상승을 통한 (왜곡된) 분배 구조로 작동해 왔습니다. 그리고 “경로의존”의 개념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60년대와는 지정학적으로나 산업 구조 및 기술 패러다임에서나 상전벽해의 변화를 겪고 난 지금 2010년대에도 그러한 종래의 한국 자본주의의 작동 구조는 변하지 않고 우리 사회를 계속 옥죄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비록 명확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누구나 꿈꾸는 그야말로 “국민적-대중적 요구”(그람시)는 바로 이러한 종래의 낡은 자본주의 모델을 탈피하는 것입니다. “경로의존”이 아니라 “경로이동path-shift”인 것입니다. 사회 전반에 걸친 보다 수평적인 구조, 보다 효율적이고 신속한 의사소통과 의사 결정, 더 많은 이들이 참여하여 자신들의 문제와 욕구와 능력과 의지를 펼쳐내고 또 충족시킬 수 있는 참여적인 거버넌스, 한 마디로 21세기 4차 산업혁명에 더욱 적합한 산업사회로의 전환을 사람들은 꿈꾸고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에 비기자면, 종래의 한국 자본주의 모델이라는 “앙시앙 레짐(구체제)”가 명운을 다했고 새로운 자본주의 모델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점차 깨달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움직임을 추동하기는커녕 가로막고 찬물을 끼얹는 가장 큰 원인이 바로 (더불어) 민주당의 “볼모 정치”라는 것이 우리들의 인식이었습니다. 우리는 민주당 자체에 대해 아무런 호오好惡도 선호도 없습니다. 단지 이들이 이러한 “경로 이동”이라는 과제를 선도할 수 있는 비전과 능력을 준비하는 과제는 거의 돌보지 않은 상태에서 엉뚱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는 행태에 탐닉해왔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뿐입니다. 욕조의 물이 빠질 때는 좁은 하수구로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에서 터지도록 분출하는 온갖 고통과 요구와 제안들은 결국 의회 정치라는 좁은 틀에서 합법적인 입법과 행정 과정이라는 병목을 거쳐야만 조금이나마 현실화될 수 있습니다. 결국 어찌되었던 의회에 진출할 수 있고 중앙 정부와 각급 지자체 정부를 장악하거나 최소한 견제할 수 있는 정치 세력이 필요하게 마련이며, 이는 선거라는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습니다. 1940년대 말 한민당을 모태로 하여 무려 70년 넘게 선거 기계로서 조직적 경륜과 역량을 쌓아온 현재의 (더불어) 민주당을 대체할 세력은 아직 없습니다. 결국 아무리 미워하고 욕을 하고 비판을 하더라도, 결국 선거 때만 되면 자신들에게 표를 찍을 수밖에 없다는 배짱에 근거한 것이 바로 (더불어) 민주당의 “볼모 정치”입니다. 이것이 이들이 미래의 비전과 그것의 실행 플랜을 마련해야 한다는 골치 아픈 과제를 외면하고서도 계속 정치 세력으로서 연명해 나갈 수 있는 비결입니다. 이들이 해야 할 일은 아주 간단합니다. 자유민주당 세력의 저열한 정치 의제에 맞서서 (똑같이) 저열한 수준의 쟁점에만 국한하여 각을 세울 것. 선거 때가 되면 연예 기획사를 벤치마크하여 참신해 보이는 후보들과 참신해 보이는 여러 정책 카피들을 얹어 흥행을 벌일 것. 그렇게 해서 선출된 뒤에는 그 즉시 다음 선거를 준비하여 기획 작업에 들어갈 것.



많은 사람들은 명시적으로 말은 못해도 그나마 유일한 대체 정치 세력이라는 이 정당의 행태를 지긋지긋하게 파악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는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 새로운 한국 자본주의의 경로 이동이라는 게 무망한 노릇이라는 것을 느낌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 3세력”에 대한 욕구는 한국 정치에서 항시적으로 잠재해 있으며, 이것이 2012년 대선 국면에서 안철수라는 인물과 만나면서 한 때 돌풍을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스]에 보면 빨랫감을 나무 막대기에 꽂아 가져가고 있으니 갑자기 어디에선가 군중들이 몰려나와 그 뒤를 따르면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불만이 팽배해 있을 때에는 깃발만 보이면 일단 물결이 터져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2019년 현재로 볼 때, “안철수 현상”이란 완전히 옛 노래가 되어 버린 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제 3세력”에 대한 사람들의 갈망까지 소멸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이를 제대로 받아 안지 못하는 정의당 등의 한계가 안타깝지만, 이 또한 깊은 원인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 있습니다. 반세기 동안 지겹게 보아왔던, 하지만 우리의 미래에는 별 희망도 비전도 주지 못했던 자유한국당-더불어 민주당의 2인극을 넘어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부동층의 유권자들은 이제 50퍼센트가 넘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5.

“진보 진영은 처음부터 다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까? 우리가 떠안은 이 시대의 화두는 한국 사회의 역사적 경로 변경이다. 경로를 바꾸기 위해서는 지향점을 정해야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야만 실질적인 추동력을 얻어 우리 현실에 맞는 변화를 모색할 수 있다. 지나온 궤적을 결정했던 힘을 파악하지 못하고 미래의 지향만을 말한다면, 80년대 형성된 좌파 운동의 전철을 되풀이하거나 민주당 집권 10년처럼 모순된 정치 행로를 반복할 뿐이다.” 



이것이 우리가 2012년, 2019년, 2030년이라는 세 개의 점을 그어 놓고 한국 사회의 궤적을 함께 그어보자고 제안하는 이유입니다. 직선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게 어찌 보면 가장 현실적인 정답이라고 보입니다. 우선 2012년은 그 전 반세기 동안의 한국 자본주의의 유산을 그대로 이어받아 그 관성으로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던 해입니다. 따라서 1960년에 시작된 기존 한국 자본주의의 궤적이 연속적으로 이어진 함수 위의 한 점으로 2012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2019년 또한 그 미분 가능한 “연속 함수” 위의 한 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서두에서 이야기했듯이, 그리고 지금 우리 모두 기억하고 있듯이, 그 때 대항마로 나왔던 문재인과 민주당 세력은 이렇다 할 만한 대안적인 비전과 계획을 제출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뒤 촛불 운동으로 벌어진 정권 교체의 최대 수혜자로서 (그야말로 “사과나무 아래에 누워 있다가 바람에 떨어진 사과를 그대로 받아먹는다windfall”고 할 만한 게 2017년 대통령 선거였습니다) 정권을 잡은 지금 2019년의 그들의 모습도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회 경제적 개혁은 사라진지 오래이며, 청와대는 되레 그러한 개혁에서 마땅히 척결되어야 할 인물들을 여러 공직자로 추천하면서 자중지란을 초래하고 있는 판입니다.



잠깐 눈을 감아 주십시오. 그리고 방금 말한 그 두 점을 이은 직선이 2030년의 점까지 쭉 이어진다면 그 때의 세상이 어떤 세상일지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의회는 여전히 양대 정당의 저열한 정쟁으로 마비 상태에 있을 것입니다. 이념으로 점철된 끝없는 역사 논쟁이 정치 쟁점의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앉을 것입니다. 압도적인 권력이 각급 정부와 의회에 집중되어 있는 현실에서, 급변하는 산업 사회의 현실에 맞추어 사회를 혁신하는 일은 기존의 기득권 세력들의 손에 족족 걸려들어 꺾어지고 말 것입니다. 절망과 좌절이 사회를 지배할 것이며, 이 사회가 아니 대한민국이라는 민족과 국가가 과연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가 팽배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가 2012년에 예견했던 바와 같이 결국 박근혜 정권도 소닉붐을 뚫지 못하자 추락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상기하십시오. 2019년 현재의 여당을 비롯한 여러 정치 세력들도 이 여러 어려운 시대적 난제를 풀어나가는 소닉붐 돌파의 과제에 있어서 박근혜 정권보다 크게 더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박근혜 정권이 맞았던 운명을 이들 정당들도 피해갈 수 없을 것입니다. 촛불이 되었든 다른 무엇이 되었든 이들을 추락시킬 무언가의 장벽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안철수 현상에서 나타났던 “제 3세력”에 대한 갈망에서 볼 수 있듯이, 민주당이 지난 25년간 믿고 의지해왔던 “볼모 정치”는 이제 그 명운이 다하고 있습니다. 사회과학자로서 저희가 일관성을 가지고 말한다면, 이들 또한 현재까지의 행태를 근본적으로 쇄신하지 않는 한 박근혜 정권과 마찬가지로 “뭉기적대다가 추락”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게 저희들의 문제의식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안철수 현상을 이어받는 “제 3의 세력”을 만들자는 알량한 바람잡이를 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급한 것은 또 다른 깃발을 들어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겹겹이 우리를 둘러싸고 질식시키고 있는 여러 시대의 도전들 - 실업, 불평등, 복지 부재, 산업 구조의 노후화, 미래의 불안정, 생태적 위기 등등 - 에 대처할 수 있는 비전과 내용과 계획 그리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우리 모두의 역량을 강화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 안아 실현하고자 하는 정치 세력이 있다면 어떤 세력이든 어떤 정당이든 대환영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경로 변경을 이룰 수 있는 길은 어떤 정당이나 정치 세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기대와 의존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문제를 털어놓고 이야기하고 대책을 마련해 나가는 능동적인 자세일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위키토피아 운동을 시작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2012년과 2019년과 2030년이라는 세 점이 자로 그은 직선이 되어서는 안 되며 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우리가 위키토피아 운동에 함께 힘을 모은다면 2019년은 그렇게 “경로의존성”으로 예정되어 있는 우리의 어두운 운명을 벗어나는 결정적인 변곡점이 될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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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commons
첨부파일
19년 4월 10일 2012년 2019년 2030년의 우리.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