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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도서출판 길, 2009) 역자 후기
등록일 2017-05-22



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도서출판 길, 2009) 역자 후기
홍기빈

시장 경제 유토피아와 사회의 발견

자기 조정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전혀 도달할 수 없는 적나라한 유토피아이다.
서구인의 의식을 구성하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 사실이다. 죽음에 대한 깨달음, 자유에 대한
깨달음, 그리고 사회에 대한 깨달음이다.

 

[거대한 전환]이 출간된 1944년 폴라니의 나이는 이미 57세였다. 다른 학자들 같으면 지적인 창조성에 있어서 황혼으로 접어들 연배에 폴라니는 그의 첫 저작이자 대표작을 출간한 것이다. 하지만 이 저작은 4개의 나라에 걸쳐 2번의 망명을 겪고 정당 지도자, 저널리스트, 노동자 교육가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며 살아온 폴라니의 일생에 걸친 고민과 연구와 사색이 모두 어우러져 나온 강렬한 저작이며, 또 폴라니가 향후 20년간 정력적으로 몰두했던 “실체 경제학”이라는 혁신적인 지적 프로젝트의 출발점이 된 저작이기도 하다. 따라서 먼저 이 저서가 나오기까지의 폴라니의 일생과 저작을 간단히 훒어보며 [거대한 전환]을 형성한 중심적 문제 의식이 나오게 된 맥락을 중심적으로 살펴본다. 그리고 이러한 여러 갈래로 형성된 문제 의식들이 어떻게 [거대한 전환] 안에 녹아들어 있는지를 살펴보고, 시장 유토피아와 사회의 발견이라는 [거대한 전환]이 어떻게 그의 만년의 이후 작업으로 이어지게 되었는지를 살펴본다.


1. [거대한 전환]의 형성: 자유, 시장, 사회


1) 19세기로부터: 자유라는 이상

폴라니는 아버지 미할리 폴라섹(Mihály Pollascek)과 어머니 세실 볼(Cecile Wohl)의 사이에서 세 번째 아들로 1886년 10월 21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누군가 1899년에 태어난 하이에크를 부른 이름처럼 그도 “마지막 19세기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태어난 연도 뿐만이 아니라 가족 환경과 그가 지적으로 성장한 배경이 19세기 유럽 문명의 핵심이라할 “자유”의 문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아버지 폴라섹은 북부 헝가리(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나 쮜리히의 공과 대학과 스코틀랜드 유학을 거치면서 철도 설계의 기술 공학 교육을 받고 쮜리히 기차역 설계의 책임을 맡는 등 촉망받는 철도 기술자가 된다. 폴라섹의 스코틀랜드 시절은 그에게 일생 동안 유지되는 인격 형성의 근본적인 계기였다고 한다. 검소하고 정직하며 열심히 일하면서 매사에 원칙으로부터 한 치의 타협이 없는 고전적인 칼뱅주의의 품성을 가지고, 개인의 내면적 양심과 자유 그리고 그를 고양시키기 위한 교육과 연구와 토론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성격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윽고 성공한 철도 사업가 및 기술자가 되어 비엔나로 돌아오지만 당시 성장하던 비엔나에서 새롭게 떠올라 귀족 행세를 하려드는 “향신(gentry)”과 졸부(nouveau riches) 계급의 속물적인 문화를 깊이 경멸하여, 이에 대한 반감으로 비록 자식들은 모두 칼뱅주의로 개종시키고 성(姓)도 폴라니(polányi)로 바꾸지만 자신 스스로는 유태인식 이름인 ‘폴라섹’과 유태교의 정체성을 끝까지 유지했다고 한다. 가정 교육에 있어서도 스파르타식 신체 훈련과 소박한 식사, 고전 및 도덕 교육으로 자식들을 어렸을 때부터 엄격하게 가르쳤다고 한다. 덕분에 폴라니 형제 자매들은 모두 어렸을 때에 영어, 독일어, 불어는 물론 그리스어와 라틴어 고전에도 능통하게 되었다.

어머니 세실은 러시아계의 유태인으로서 자유분방하고 사교적이며 상상력이 넘치는 보헤미안적인 성품의 소유자로서 남편과 크게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세실은 새로운 사상과 흐름에 관심을 가진 이로서 (이미 1910년대에 프로이트 심리학에 큰 관심을 가졌다), 사상가, 혁명가, 문인 및 예술가들을 항상 집으로 불러 함께 식사와 토론을 즐기고 후원하면서 “세실 아줌마(Cecile Mama)”라는 이름으로 헝가리의 좌파 지식인들과 운동가들을 사이에 크게 존경받는 인물이었고, 강연이나 저술은 물론 이후 아동 교육의 혁신을 위해 실험적인 유치원을 운영하기도 하는 등 (작가 아더 케슬러(Arthur Kestler)의 자서전에도 이 유치원에 다녔던 회상이 나온다.) 다방면의 관심과 활동을 보인 이였다. 특히 세실은 당시 외국으로 추방되거나 망명한 러시아의 혁명가들에 대해 깊은 경모(景慕)를 가지고 긴밀한 친교를 유지하여, 트로츠키와 라데크 등의 볼세비키는 물론 나로드니키 등의 인민주의 및 아나키스트 혁명가들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내면화하고 있었던 캘빈주의에 입각한 내면의 양심과 도덕적 엄격성 그리고 어머니가 체현하고 있었던 19세기 말의 혁명적 상상력은 얼핏 모순되어 보이기도 하지만 근대 유럽 문명이 낳은 “자유”라는 이상의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두 얼굴이며, 그러한 동일성과 모순성으로부터 나오는 엄청난 역동성이 19세기까지의 유럽 문명의 정신적 추동력의 본질이기도 하였다. 아버지 어머니의 인격에 체현된 이 두 개의 경향과 이상은 그 모순적인 역동성까지 포함하여 고스란히 어린 칼 폴라니의 인격 및 의식으로 들어온다. 당시 아직도 교권주의(clericalism)와 여러 낙후된 억압적 사회 기제가 누르고 있었던 헝가리에서 폴라니 자녀들은 어릴 때부터 도덕적 이상주의에 근거한 급진주의의 성향을 보인다 (맏형이었던 아돌프(Adolf)는 헝가리 최초의 사회주의 학생 조직의 창설자였고, 고등학교 때에 이미 러시아 혁명가들의 저작을 헝가리어로 번역했다). 

폴라니도 이미 16세에 형이 창설한 사회주의 학생 조직에 가입하여 독일 사회민주당의 강령과 마르크스주의를 학습한다. 하지만 그는 사회민주당에 가입하지도 않았고, 그의 회고처럼 “22세 이후로는 마르크스주의에 흥미를 완전히 잃었다”.1) 당시의 지배적 형태의 마르크스주의는 경제 결정론에 입각한 사적 유물론과 물질주의적 유물론 철학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는데, 폴라니는 이러한 “과학주의적”인 사회관이 인간의 자유 의지와 도덕적 상상력에 근거한 혁명적 행동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거부한 것이다. “진정한 진리는 만유인력의 법칙이 아니라 중력을 뿌리치고 새가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는 것”이라는 것이었다.2) 하지만 폴라니는 지적 사상적으로 낙후되고 사회적으로 억압과 착취가 벌어지고 있는 사회 현실에 깊이 분노하여 그가 학생으로 몸담고 있었던 부다페스트 대학의 청년들에게 급진적 행동과 사상의 영감의 원천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 대학의 로마법의 권위자인 피클러(Gyula Pikler) 교수가 반동적인 학생들에게 습격을 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법학 연구에 있어서 과학적인 사회학의 방법론을 들여올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던 그의 혁신적인 견해가 전통주의자들과 교권주의자들의 분노를 샀던 것이 원인이었다. 이에 칼 폴라니를 중심으로 한 진보적 학생들이 피클러 교수를 방어하기 위해 반동적 학생들과 주먹 싸움을 불사하는 대결을 벌여 빛나는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진보적 학생들은 1908년 갈릴레이 써클(Galilei Circle)을 창립하고 칼 폴라니를 초대 의장으로 선출한다.

당시 헝가리의 사회주의 학생 운동이 이미 지리멸렬의 상태에 놓여 있었던 가운데 갈릴레이 써클은 청년들에게 새로운 지적 사상적 정열의 방향을 제시한다. 갈릴레이 써클은 직접적인 정치 조직이 아니었다. “배우라 그리고 가르치라(eppur si muove)”는 모토 그대로 대학 내에서의 혁신적인 사상 운동 그리고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하는 도시 하층민들과 농민들에게 교육과 계몽 활동을 하는 조직으로서, 해체될 때까지 헝가리 도처에서 무수한 강연회를 조직하였다. 인간의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기 위해 낡은 신조와 사상을 벗어던져야 한다는 폴라니의 신념은 청년들의 지식욕을 고무하여 당시 최신의 사상이었던 아인시타인, 프로이트, 에른스트 마하(Ernst Mach) 등이 정열적으로 연구되고 토론되었다.3)

이렇게 폴라니는 “이상주의적 19세기인”답게 어떤 하나의 지적 사상적 입장에 수동적으로 편입되거나 동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적인 도덕과 가치에 근거하여 당대의 여러 지적 사상적 실험과 조류와 적극적으로 조우하는 역동적인 지식인의 모습을 갖추었다. 또 그 속에서 폴라니는 이미 자신을 낳고 기른 19세기 유럽 문명의 이상과 당시에 어지럽게 진행되는 변화 속에서 새로이 모습을 드러내는 20세기의 자본주의 문명이 정면으로 충돌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가 23세라는 어린 나이인 1910년 [20세기(Huszadik Század)]지에 게재했던 짧은 에세이 “우리 이념의 위기(Nezeteink Valsaga)”에는 이러한 인식이 뚜렷이 드러나 있다. 19세기 문명의 주요한 이상에는 자유주의자들의 “완전히 인격적 존재로서 계발된 개성과 내면의 자유” 그리고 노동자들이 힘을 합쳐 사회 모순이 해결된 이상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 두 가지가 있다. 그런데 20세기의 집단화된 자본주의는 이 두 가지의 이상을 모두 무너뜨리거나 변질시켜버릴 것이다. 먼저 “개성과 자유”의 이상은 이러한 집단화된 20세기 형 자본주의가 전 사회에 강요하는 순응주의 속에서 완전히 말살되고 억압될 것이다. 둘째, 사회주의 운동의 이념과 이상은 단지 국가를 매개로 한 집단적 자본주의의 순탄한 축적과 작동을 위해 노동자들을 매수하고 타락시키는 국가 이데올로기로 변질되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19세기적인 자유주의 시장 경제의 몰락과 파시즘의 발흥 그리고 그로 인한 인간 자유의 위기라는 [거대한 전환]의 주요한 테마가 이미 이 글에서 보이고 있다. 


2) 1차 대전과 사회주의: 인간 실존의 의미와 사회의 실재

성년이 된 폴라니의 신변에도 큰 변화가 온다. 먼저 그의 아버지가 기획하던 1천 킬로미터 철도 사업이 파산하고4) 곧이어 아버지가 1906년 별세하면서 폴라니 집안은 심한 경제적 곤핍에 시달리게 된다. 1909년 콜로스바(Koloszbár) 대학에서 법학 학위를 받은 폴라니는 삼촌의 변호사 사무실에서도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돕다가 1차 대전의 발발과 함께 군에 입대하여 동부 전선으로 파견되며, 전선에서 폐결핵까지 걸리게 된다.

1차 대전은 실로 무의미한 집단 광란이었다 - 최소한 전쟁에 참여했던 유럽의 젊은이들은 그렇게 느꼈었다. 동부 전선의 차가운 하늘 아래에서 이러한 전쟁의 참상과 무의미성에 몸과 마음이 침식당하던 폴라니는 인간의 영혼과 삶의 의미라는 근원적인 문제와 조우하게 된다. 나중인 1954년 그가 발표한 세익스피어 연구 에세이 [햄릿(Hamlet)]에서 그 당시의 회상을 찾아볼 수 있다. 어느 날 말을 몰고 가던 중 말이 실족하여 쓰러지지만, 전쟁과 질병에 지쳐 동부 전선의 차가운 하늘은 “작은 원반처럼 좁아들어” 가고 있었던 폴라니는 넋을 잃은 채 말에 깔려 죽을 위험도 생각지 못하고 말과 함께 그대로 옆으로 쓰러지고 만다. 그때 그는 인간의 삶의 의미가 무엇이며 거기에서 영혼이 살아 있는 인생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에 대한 순간적인 깨달음을 얻게 된다. 너무나 황당한 상황에 처하여 황당한 명령을 받게 되어 멜랑콜리에 빠져버린 햄릿처럼, 인간은 자신의 인생과 죽음의 의미를 깨우치지 못한 상황에서는 아무런 능동적인 삶의 계기를 얻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단지 숨만 헐떡거리며 쉬고 있는 살덩어리에 불과한 존재가 된다. 햄릿의 저 유명한 독백, “살아 있을 것인가 아니면 죽어버릴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저 운명이라는 년이 던지는 돌팔매를 참으며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무기를 들어 삶을 끝장 내어 버릴 것인가”라는 구절의 의미를 알게 된다. 삶의 의미를 얻지 못하고 숨만 쉬는 존재는 죽음보다 못한 상태이며, 여기에서 인간은 삶과 죽음의 관계를 알게 되고 햄릿처럼 기쁘게 행동에 나서서 삶을 일구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다.

부인 두친스카의 말에 의하면, 전쟁에서 돌아온 폴라니는 이제 그가 평생을 걸쳐 고민하게 되는 문제, 즉 “인간의 고통과 불행의 근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로 받아안게 된다.5) 인간의 자유라는 이상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구체적인 역사적 사회적 조건 안에서만 실현 가능하지만 그것에 의해 크게 제약당한다. 자유를 그저 추상적 이상으로서 관념하였던 다른 자유주의자들과 달리, 폴라니에게 있어서 자유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고통인 삶의 무의미성을 극복하고 죽음도 삶도 끌어안을 수 있는 영혼을 회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치료책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자유는 현실의 사회에 실현 가능한 구체적 목표로 제시될 필요가 있었고 그것을 제약하는 현실 조건과의 정면 대결에서만 참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했을 것이다. 폴라니는 1921년 경부터 톨스토이에 깊이 심취하면서 인간의 존재와 행복이 얼마나 사회 전체의 비참한 상태와 풀어낼 수 없이 엮여 있으며 아무도 여기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회 실재의 현실을 깊이 고민하기도 한다. 

전쟁 직후 일대 격변에 빠져든 헝가리의 정치 상황은 이러한 그의 고민을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의 문제로 절박하게 제기하였다. 폴라니는 이미 전쟁 전인 1914년 오스카르 야씨(Oskár Jászi) 등과 함께 급진시민당(Radikális Poltgári Politika)을 조직하고 그 초대 서기장으로 잠깐 활동한 적이 있었다. 이 정당은 민주주의의 원칙을 핵심으로 삼고 도시 중산층과 노동 계급 및 농민을 하나로 조직하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목표로 삼는 정당이었기에, 전쟁 후 1919년 볼세비키가 조직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표방하며 123일 간 지속되었던 헝가리 사회주의 공화국 체제 및 공산주의 지식인들과 공존할 수 없었다. 폴라니 또한 격렬한 논조로 볼세비키를 비판하고 민주주의 원칙을 유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후 극우 반동 세력의 쿠데타로 혁명 정권이 무너지자 폴라니 또한 즉시 비엔나로 망명하여6) 생활의 터전을 마련하고, 1923년 혁명적 사회주의자였던 일로나 두친스카(Ilona Ducynska)를 만나 결혼한다.

비엔나에서 그는 1924년부터 당시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와 함께 서구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경제 신문이었던 [오스트리아 경제(Österreichsche Volkswirt)]지의 국제 문제 담당 선임 편집자가 되어 생활의 안정을 얻는 한편7) 경제학을 위시한 다방면의 지적 활동을 시작한다. 1920년대의 비엔나는 말할 것도 없이 당시 세계에서 지적인 에너지가 가장 폭발적으로 터져나오던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비엔나에 성립된 사회주의 정권의 기간 동안 유례없이 고도로 발달한 노동자 문화 - 소위 ‘붉은 비엔나’ - 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특히 이곳은 칼 멩거(Carl Menger)에서 시작하여 비저(Wieser), 뵘-바베르크, 미제스(Ludwig von Mises) 등의 오스트리아 경제학파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폴라니의 경제학 연구의 관심과 목표는 이론적인 정합성을 가진 추상적 경제 이론의 구성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들의 삶 속에서 자유의 실현 가능성을 알아내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었다.8) 그래서 그는 가격 이론에 있어서는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보다 오스트리아 학파의 한계효용가치론이 우선 과학적으로 더욱 정합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경제적 선택과 가치의 자유로운 발현이 보장되는 종류의 사회주의 경제를 구성하는 데에 훨씬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후자를 더욱 선호하는 독특한 입장에 선다. 하지만 재화와 서비스 시장에서의 비용과 효용이라는 기술적 조건에 의해 시장 가격이 형성되며 그것이 “현실의” 경제의 운동과 균형을 그대로 결정한다고 보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전체적 경제 이론은 거부한다. 실제의 현실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Vergesellschafte Mensch)” 즉 자신의 도덕적 미학적 경제적 가치와 이상 등의 포괄적 관계로 맺어지는 인간들의 관계로 구성된 전체 사회의 역동에 의해 결정되며, 인간의 자유에 대한 속박과 가능성은 그것을 바꾸고자 하는 인간들의 노력에 의해 끊임없이 재창조되는 것이다. 따라서 오스트리아 학파의 경제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처럼 운동하는 소위 시장 경제의 운동 법칙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복종하도록 인간과 사회를 무릎 꿇리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또 그렇게 논리적으로 구성된 시장의 세계가 아무리 논리 정합적이라고 해도 그렇다고 해서 현실의 경제도 그와 동일하게 운동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심각한 논리적 비약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폴라니의 독특한 사회주의적 관점이 1920년대의 유명한 “사회주의 계산 논쟁”에서 표출된다. 당시 철학자이며 오스트리아 재무부 관료로도 일했던 오토 노이라트(Otto Neurath)는 시장 경제를 철폐하고 완전히 중앙 정부의 경제 계획에 의존하는 명령 경제를 수립하자는 안을 내놓았다. 그는 시장 기구가 멈추고 일종의 배급 경제가 행해지던 전시의 경험을 상기하면서, 오로지 투입물의 상관 계수와 기술적 생산 관계의 지식만 있으면 생산 뿐 아니라 소비까지도 모두 “현물로” 조직할 수 있으니 화폐를 폐지해야 하며 따라서 시장 기구도 사적 소유도 모두 폐지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여기에 맞서서 미제스는 한계 효용 이론에 근거하여 자유로운 시장에서 형성된 가격이 아니라면 합리적인 회계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노이라트가 주장하는 대로 국가가 순전히 경제의 기술적 측면만을 경제적 계산의 기초로 삼는다면 회계 장부에서의 합리적 비용-편익 분석이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가격이라는 정보가 표시하는 것은 단순한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비용 지출을 통해 들어오는 한계 효용 - 예를 들어 일정 생산 요소 투입의 한계 생산물의 가치 - 을 통해 기회 비용을 계산해야만 어떤 소비(혹은 생산)을 어느 만큼 하는 것이 가장 알맞은가라는 최적화(optimization) 행동을 할 수 있게 되며, 그러한 선택이 담긴 시장 가격만이 낭비와 부족을 막을 수 있는 정보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이라트의 사회주의 경제는 합리적 의사 결정에 기초가 되는 합리적 경제 계산의 정보를 생산할 수 없으며, 사적 소유, 화폐, 시장 교환 등은 경제가 합리적 계산에 기초하여 성립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인프라라는 것이었다.

폴라니는 이러한 국가 계획의 사회주의와 시장 지배의 자본주의의 두 가지를 모두 배격하고 그의 독특한 이론에 근거한 사회주의적 회계의 가능성을 주장한다. 폴라니가 보기에 노이라트와 미제스 모두 경제라는 현상이 사회에서 벌어지는 인간들의 작품이 아니라 마치 자연과학적 현상처럼 논의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생산과 소비라는 경제 활동에는 물론 기술적 조건과 인간 노동의 희생과 같은 기술적 자연적 측면이 있지만, 경제적 계산 즉 회계의 제반 범주는 모두 사회적으로 구성 - 여기에는 권력적인 관계도 작동한다 - 되는 것 대해 폴라니는 노이라트가 주장하는 국가의 경제 계산과 미제스의 시장 가격 경제 계산을 모두 비판한다. 양쪽 모두 경제적 가치 계산의 문제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의지로 결정되는 “사회적”인 문제임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산물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축과 별개로 인간들의 제반 사회적 가치와 또 생산자와 소비자의 집단적 욕구와 고충이 모두 반영될 수 있는 사회주의적 회계 체계를 만드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 두 이론 모두 자연적 기술적 차원에서의 경제적 비용과 이익이라는 “자연적”인 문제들만을 해결할 뿐 인간이 개인적 집단적 차원에서 자신의 내면에 담고 있는 가치와 욕망과 고충의 차원을 살피는 과제 즉 “내면 조망(Innenbersicht)”을 전혀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었다.9) 여기서 폴라니는 그의 독특한 “기능적 민주주의(Funktionelle Demokratie)”를 꺼내든다.10) 즉, 생산자와 소비자가 각각 조합을 만들고 여기에 생활 협동 조합, 지방 자치체, 심지어 정당 등 각각의 기능에 따라 사람들이 모이게 되는 모든 사회적 단위에서 일 수 있는 모든 단위에서 경제적 의사 결정의 의견을 개진하여 집단적 토론을 벌이는 방식으로 사회주의적 회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사회주의 계산 논쟁에서 보여준 폴라니의 기여는 시장 자본주의는 물론 중앙 국가의 정책 결정에 따라 생산과 분배가 일률적으로 계획되는 공산주의적 사회주의와도 전혀 무관하게 다양한 사회적 집단 간의 토론과 정보 교환으로 합리적 경제 계산을 가능케 할 ‘등가’를 형성시킬 이론적 가능성을 열었다는 데에 있다.11) 하지만 이러한 이론적 가능성만으로 현실 사회의 경제가 실제로 작동하는 바를 설명할 수는 물론 없는 일이다. 펠릭스 샤퍼에 의하면, 폴라니는 이미 20년대 후반부터 경제학 연구의 초점을 점차 실제의 경제사적 과정으로 옮기기 시작했으며, 이때부터 이론적으로 구성된 경제의 상과 현실 경제의 작동을 분리하여 파악하는 “이중적 운동”의 개념이 폴라니에게 서서히 싹트기 시작했다고 회고하고 있다.12)      


3) 시장 경제의 몰락과 파시즘: 인간 고통의 밑바닥에서

20년대 후반기 세계 경제의 호황과 ‘붉은 비엔나’는 오래 가지 않았다. 30년대 초의 대공황과 영국의 금본위제 탈퇴, 히틀러의 집권, 독일 및 일본의 워싱튼 체제 부정 등 20년대의 세계 체제는 급속히 무너져 가고 있었으며, 1934년에는 결국 비엔나의 사회민주주의 정권도 돌푸스(Dolfuss) 파시즘 정권으로 폭력적으로 바뀌게 된다. 

[오스트리아 경제]지의 국제 문제 담당 편집자였던 폴라니는 이렇게 급박하게 변동하는 지구적 정치경제 체제의 변화 과정을 긴밀하게 관찰하고 미국의 뉴딜, 소련의 5개년 계획, 영국 내부의 노동 정치의 변화와 위기, 중국 혁명의 전망 등 지구정치경제 전반에 걸쳐 수많은 글을 써낸다. 그런데 폴라니는 1924년에서 1938년까지 약 250개의 기사를 쓰지만 1932년까지는 일년에 8개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러다 1933년 [세계 경제 위기의 메카니즘(Der Mechanismus der Weltwirtschaft)]을 발표하면서 기사의 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이 경험 속에서 폴라니는 “보수적 20년대”에서 “혁명적 30년대”로 전환하는 지구적인 거대한 전환의 과정을 아주 세밀하게 관찰하며, 그러한 관찰과 성찰의 결과는 [거대한 전환]에 고스란히 실리게 된다.

하지만 1933년 독일에서의 히틀러의 집권과 함께 더 이상 [오스트리아 경제]에 폴라니가 마음껏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은 존재하지 않았고, 점점 조여오는 파시즘의 마수에 폴라니는 신변과 생활의 위협을 느끼게 되고, 결국 같은 해 영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영국 통신원으로서 [오스트리아 경제]가 나찌에 의해 폐간되는 1938년까지 계속 기고하지만, 영국이라는 새로운 지적 환경에서 새로운 활동을 찾아나간다. 옥스퍼드 대학의 성인 교육 그리고 특히 [노동자 교육 협회(Worker's Education Association)]에서 그는 그의 교육자로서의 천분을 살려 성인들 특히 노동자들의 교육을 맡는다. 망명하여 언어 문제로 고통을 받았던 다른 유럽인들과 달리, 어릴 때부터의 교육으로 모국어 이상으로 영어에 능통했던 그는 영국 노동자들에게 영국 경제사를 가르치는 강의를 맡게 된 것이다.13)

‘붉은 비엔나’의 높은 수준의 노동자 문화에 익숙해 있었던 폴라니는 고전적인 시장 자본주의의 나라 영국의 노동자들과 가까이 사귀면서 시장 자본주의가 인간을 어디까지 망가뜨릴 수 있는지를 경악을 금치 못한다. 맨체스터에는 아직도 엥겔스가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에서 묘사했던 노동자촌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19세기 이래 인간을 완전히 노동 시장의 상품으로 만들고 철저한 계급적 차별을 통해 노동자들을 그저 일하고 돈만 버는 문화적 불구 상태로 만들어온 영국 자본주의를 보면서 폴라니는 19세기 초 산업 혁명 그리고 그로 인한 시장 경제의 출현이 인간과 자연을 얼마나 심하게 망가뜨릴 수밖에 없는 것인지를 발견하고, 이는 시장 경제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변한다. 시장 자본주의의 벌거벗은 진면목 앞에서 폴라니는 부인 두친스카야의 표현에 의하면, “성스러운 분노”를 마음에 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침식을 잊고 도대체 “리카아도 시절의 영국”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가를 알기 위해 영국 경제 및 사회사 연구에 몰두한다.

여기에서 그가 발견한 시장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단순한 ‘경제적 착취’의 문제점이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분노했던 지점은, 인간이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단순히 시장에서의 상품이라는 허울을 씌워 인간의 모든 사회적 문화적 욕구를 처참하게 부정해버리는 시장 자본주의의 더욱 포괄적인 인간 파괴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폴라니의 분노를 이 책 13장과 14장의 격한 어조에서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시대에 자행되고 있었던 파시즘이라는 인간과 사회 파괴의 정신적 기원을 찾아낸다. 애초에 인간에게 전혀 적용될 수 없는 ‘상품 허구’를 억지로 적용하여 생겨난 19세기의 시장 자본주의는 그 유토피아적인 억지로 인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영혼과 개성적 인격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을 부정하고 단지 산업 사회의 균형과 조정이라는 기능을 위해서 무자비하게 비틀려져야 할 기능적인 숫나사 암나사로 바꾸어버리는 파시즘의 정신적 태도의 연원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러한 단순한 경제적 착취가 아닌, 인간의 문화적 파괴를 가져오는 시장 자본주의의 몰인간성을 발견한 폴라니에게 또 하나의 중요한 이론적 영감이 주어진다. 1932년에 출간된 젊은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초고]가 그것이었다. 이 글은 마르크스가 파리에 망명하던 1844년 시절에 쓴 노트에 포함된 것으로서, 1932년 당시 소련에서 리아자노프 (David Ryazanov)의 편집으로 1927년부터 나오기 시작한 마르크스 엥겔스 전집 (Marx-Engels-Gesamtausgabe)의 기획으로 1932년 처음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14) 재미있는 것은 마르크스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도 폴라니와 마찬가지로 당시 영국 노동 계급의 비인간적 상황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이미 헤겔 정치 철학에 대한 내재적 비판을 완결하고 새로운 사상의 도약을 모색하던 26세의 마르크스는 당시 새로이 알게 된 친구 엥겔스가 전해준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를 듣자 단순한 경제적 착취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공동체적 본질과 거기에서 노동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리고 그 노동의 능력이 어떻게 양도(讓渡: Entäusserung, alienation)당하며 그 결과 어떻게 낮선 것으로 소외(Entfremdung, estrangement) 되는가를 정치경제학과 철학의 관점에서 집중적으로 논의한다. 폴라니는 그 전에 마르크스주의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던 때가 두 번 - 젊은 시절의 사적 유물론 연구 그리고 20년대에 사회주의 경제학 구성을 위한 [자본론] 연구 - 이 있었으나 모두 자신과 다른 견해로 거리를 멀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경제학-철학 초고]에 나타난 젊은 마르크스의 인간적 철학적 혜안에  칼 폴라니는 이번에는 근본적인 영향을 받고 열광하게 된다. 그가 당시에 [경제학-철학 초고]를 강연했던 원고의 일부를 본다.

공산주의를 통해 모순을 해소하려는 노력은 인류가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밟아야 할 다음 단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유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고립된 인간이란 하나의 추상일 뿐이다. 인간이 자신을 충족시키는 것은 사회 안에서다. 인간은 이러한 사회적 활동 안에서만 비로소 충만하게 인간이 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적 소유에 바탕을 둔 사회에서 인간은 자기 소외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욕구와 필요는 비록 그것들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해도 인간적인 것이 아니게  된다. 감각들 또한 인간적인 것이 아니게 된다. 욕구, 감각, 필요의 대상들이 인간적인 방식으로 인간과 관계할 때에만 그것들은 인간적인 성격을 띨 수 있다. 하지만 인간 세상과 관계된 모든 일이 그렇듯이, 이 또한 인간의 물질적 현존의 생산이라는 과제를 수행하는 제조건에 달려 있다. 오늘날 그러한 조건들이 인간성과 모순 관계에 빠진 것이다.15)
 
여기에서 폴라니는 잉여가치 이론으로 착취율을 계산하는 [자본론]의 마르크스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인간적 감각을 계발하고 다른 인간들과 형제자매가 되어 자연을 아름답고 유용하게 가꾸어가려고 하는 “총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젊은 마르크스의 문제틀을 받아들이게 되고, 시장 자본주의와 인간 사이의 모순을 그러한 폭넓은 틀로 보게 된다. 이를 통해 그는 자기 조정 시장이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인간 본질과 정면 충돌하는 유토피아일 수밖에 없다는 확신을 굳혔을 것이며, 이것이 그의 “허구적 상품”의 개념의 중요한 영감이 되었음은 분명해 보인다.16)

폴라니는 영국의 기독교 사회주의자들과 긴밀하게 교우하면서 이러한 시장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이라는 정신적 기원에서 얻은 영감에 힘입어 파시즘의 철학적 정신적 본질에 대한 분석 작업을 계속하며, 1935년 [파시즘의 본질(The Essence of Fascism)]을 발표한다. 파시즘의 핵심을 관통하는 정신적 원리를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파시즘이라는 현상이 워낙 다양하기도 하지만, 그 교의라는 것을 추려본다 해도 너무 잡박하고 논리가 거칠어서 일관된 체계를 구성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폴라니가 이 글에서 실로 어려운 시도에 도전한 것이었지만, 그의 관점은 대단히 명쾌하다. 그것은 파시즘이 “영혼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을 부정한다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먼저 좀 길지만 1935년 경에 제작된 폴라니의 강의 노트 중 일부를 인용해 본다.

20세기 자본주의는 모든 인간성을 아예 말끔히 뿌리뽑을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다음과 같은 인간을 공급하지 못한다면 하나님도 영 제 몫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즉 냄새 감지기와 촉각 표시 장치는 물론 시각과 청각, 미각을 갖춘 통제 장치 그리고 두 팔과 두 버팀대가 달린 틀거리로서, 잘 움직이면서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먹여야 할 입도 씻어야 할 피부도 살아야 할 삶도 없는 그런 인간 말이다. 아무래도 하나님은 신성 질서 회사(Divine Order Company)의 중역회의에서 계속 보내온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 하지 못한 모양이다. 중역회의는 골치 아픈 영혼이라는 놈을 몸에 지닌 아이들이 계속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보고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점이 조정될' 때 까지 자본가들은 차선책을 취해야 했다. 즉 노동자들의 인간적 요소가 자기 실현이나 공동체 같은 마음속의 희망을 지향하지 않고 딴 데로 향하도록 그들이 싸워야 할 용과 괴물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들은 노동자들의 허물어진 집 위로 밤새 떠돌아 다니는 유령들을 그려내야 했다. 또 사람들을 먼 곳으로 보내 그 용들과 싸우도록 훈련시켜야 했고 그 중 일부는 낮선 땅에서 그 도깨비들과 싸우겠다고 자원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이제 자신들 휘하의 사이비 인간들에게서 인간적 삶을 완전히 분쇄해버렸으니 해외에 있는 경쟁자들을 쓸어버릴 차례다....
 더 많은 사이비 인간이 필요하다...인간들이 사이비 인간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동체도 사이비 공동체가 된다. 항상 사이비 인간들의 공동체를 지지해온 조직들이 이를 환영하고 합리화한다. 보편적 공동체를 지향하는 공동체는 완전히 사라지고,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인격적 자아의 실현을 추구하려 들면 공산주의이자 '국가'에 대한 반역이라고 낙인찍힌다. 인체의 욕구 중 호흡 중추보다 위에 있는 부분의 욕구는 아무 것도 충족되지 못한다. 두뇌피질은 여기에 순응하지 못하고 미쳐간다. 원래 멀쩡하던 모든 이들이 이제 제정신이 아니다. 전 세계가 정신병원 같은 분위기다. 하지만 좀 더 병이 깊은 신경증 환자들이 나서서 덜 미친 대중을 이끈다. 자기뿐만 아니라 이웃들도 미쳤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유쾌한 안도감이 온 나라에 퍼진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이 사실은 전혀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정작 미친 것은 세상이다. 지구 곳곳에서 사악한 괴물들을 무찌르기 위해 십자군을 조직한다. 보탄(Wotan)17) 숭배가 국가적 종교가 된다.18)

그렇다면 본래 인간에게 있어서 인격적 개성과 영혼과 공동체와 신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완전히 동일한 것이다. 
“개인의 인격과 개성은 무한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신이 계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류 형제애의 교리이다. 사람들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은 그들이 무한한 가치를 가진 개인이라는 말을 다르게 표현한 것일 뿐이다. 그들이 모두 평등한 이들이라는 것도 그들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 뿐이다. 인류 형제애의 교리는 인격적 개성이 오로지 공동체 안에서만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공동체의 실체는 바로 개성적 인격체들의 관계이다. 그리고 공동체가 현실에 이루어지이다라는 것이야말로 신의 뜻이다.19)
이를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그토록 파악하기 힘든 파시즘이라는 현상의 본질이다. 파시즘은 헤겔, 니체, 생기론 철학, 민족주의, 인종주의 등 오만 요소를 끌어안고 있지만 그 어떤 것도 본질은 아니다. 본질은 “인간 영혼의 부정”에 있다. 그리하여 “변증법 없는 헤겔”, “초인(Superman)없는 니체”가 나타나고 비합리적 생기론만 판을 치는 가운데에 인간의 정신은 끈적거리는 육체의 백(魄)의 진화 단계로 퇴행해버린다.

20세기 초 1차 대전으로 시작된 인류의 거대한 고통의 소용돌이를 해명해보고자 “살이 마르도록”(두친스카의 표현) 몸부림쳤던 폴라니는 이제 그 고통의 기원을 찾은 것이다. 그 기원은 19세기 초 영국의 산업 혁명 그리고 그로 인해 나타난 자기 조정 시장 경제의 출현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작업은 그러한 시장 경제가 얼마나 인간과 자연의 본성과 동떨어진 터무니없고 달성 불가능한 “유토피아”인가, 그리고 그러한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어떻게 출현하여 전 인류의 사고를 지배하게 되었는가, 그 결과 사회라는 실체는 여기에 어떻게 대응하였고 그 결과 파시즘, 혁명, 양차 대전, 대공황과 같은 폴라니 당대의 전대미문의 소용돌이가 어떻게 전 지구를 휘말아넣게 되었는가를 차례로 설명하는 작업이 남았다. 폴라니는 미국 버몬트의 베닝튼 대학(Bennington College)에서 자리를 잡아 1940년 미국으로 이주하며, 여기에서 3년간 그 작업에 몰두하여 저서를 준비한다. 그 저서의 계획된 제목은 [자유주의 유토피아: 지각변동의 기원(Liberal Utopia: The Origin of Cataclysm)]이었다.20)  



2. [거대한 전환]: 시장 유토피아와 사회의 발견

이 책은 그 “거대한 전환”을 함께 몸소 겪은 동시대의 서구인들을 위해 쓴 책이므로, 지금을 사는 우리들이 좀 더 평이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책을 읽는 순서를 약간 바꾸어서 구성해볼 필요가 있다.

3장 - 5장: 이 부분은 인류 역사의 진화에 있어서 경제가 사회와 맺는 관계를 포괄적으로 해명하고, 그 속에서 시장 경제가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가를 설명한다. 인간 사회에 있어서 경제가 차지하는 위치는 19세기 특유 - 자유주의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공히 나타난 - 의 “경제주의적 편견”에 의해 크게 오해되어왔다. 인간은 모두 자기의 이익이라는 “경제적 이해”로 움직이는 존재이며, 따라서 그렇게 구성되는 시장 경제의 경제적 법칙이야말로 전 역사에 걸쳐 모든 경제와 나아가 사회까지 지배하는 법칙이라는 것이다. 폴라니는 당시 최신의 경제 인류학 및 고대 중세사의 성과를 빌어서 이러한 관념이 19세기인들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철저히 논증한다. 경제는 사회적 과정에 “묻어들어(embedded)” 있는 것이며, 특히 시장 경제는 인류 사회의 보편적 경제 형태이기는커녕, 최소한 200년전 까지는 어디서나 “부수적 존재”로 철저하게 억압되어왔다는 것이다. 개인의 이윤 동기로 조직되는 시장이라는 형태는 16세기 영국에서처럼 자유롭게 풀려날 경우 급속도로 사회와 인간과 자연을 파괴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경제 활동을 깡그리 시장 제도 하나만으로 조직하여 그것으로 자기 조정 시장을 세운다는 것은 적어도 지난 수천년 수만년의 인류사에 비추어보면 “자연적”이기는커녕 극히 인위적인 유토피아의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6장 - 10장: 그렇다면 이토록 비현실적인 자기 조정 시장 경제라는 유토피아는 어떻게 생기게 된 것일까? 가장 주요한 원인은 산업 혁명을 통해 기계제 생산이 출현한 것에 있다. 예전의 기계는 인간의 노동을 보조하는 것이었던 데에 반해, 새로이 나타난 값비싼 기계들은 인간의 기능을 대체하고 오히려 인간을 자신의 보조적 위치로 떨어뜨려버리는 것들이다. 생산의 주체는 이 값비싼 기계가 되어 버리고, 인간과 자연은 그 기계의 작동을 위해 들어가는 ‘투입물’로 위치가 떨어진다. 그런데 이 기계는 예전의 기계와 달리 큰 자본을 투하하여 구입하는 것이므로, 시장의 변덕에 맞추어 기계 가동률도 자동적으로 변해주어야 하며, 이 과정에서 채산성을 유지하려면 기계 가동률의 증감에 따라 ‘투입물’인 인간과 자연은 저절로 그 투입량이 조절되어 호황시에 마음껏 구입하였다가 불황시에는 바로 잘라 낼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 결국 인간과 자연 그리고 기계 생산의 불가결의 요소인 화폐 - 사회적 구매력 - 또한 아무 때이건 원하는 만큼 사고 팔 수 있는 ‘상품’처럼 취급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과격한 상상력이 쉽게 나타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상품화의 마지막 단계였던 인간의 상품화는 영국의 경우 지주 세력의 거센 저항에 부닥치고, 이들은 실업자에게 무조건 생활비를 보장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스피넘랜드 법을 만들어낸다. 결과는 끔찍한 참극이었다. 원호대상 극빈자들의 숫자는 한없이 늘어만 가고 노동 생산성도 한없이 추락하였지만, 가장 끔찍한 것은 그 와중에서 인간이 인간의 형상을 잃고 “구별조차 불가능한 짐승떼”로 전락해 버렸다는 것이다. 이 “지상에 올라와 아가리를 벌린 생지옥”을 보면서 자유주의자들은 인간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 존재하기에 그것에 순응하는 것만이 인간이 이 참극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라는 광신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생각을 체현한 고전파 정치경제학이 하나의 과학적 법칙의 지위를 얻게 되면서 결국 인간도 노동이라는 상품으로 만들어버리는 이 유토피아의 마지막 단계의 완성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로버트 오언이라는 중요한 예외가 있었다. 마키아벨리, 루터, 홉스에 이르는 근대 초기의 사상가들은 국가의 영역이 사회의 실체라고 상상하였고 이제 헤겔과 리카아도는 새로이 발견된 시장 경제가 사회의 실체라고 상상하였지만, 오언은 국가와 시장이라는 두 가지의 영역은 물론 기계라는 압도적인 현실에도 눈이 어두워지지 않았고, 이 모든 북새통과 시련의 밑바닥에 버티고 있는 진정한 실체는 인간들과 자연들이 구체적으로 맺는 관계, 즉 사회 실재의 현실임을 갈파하였다. 드디어 국가도 시장도 아닌 ‘사회’라는 실체가 발견된 것이다. 오언은 그의 천재적인 통찰을 통하여 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시장 경제의 법칙 앞에 인간을 내어맡기는 것도 아니며 또 국가의 법령과 명령으로 후퇴하는 것도 아니라 바로 그 사회라는 실체를 강화하고 재구성하는 것임을 역설한다.

11장 - 16장: 이제 인간, 자연, 화폐까지 모두 상품이라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품 허구가 보편화되면서 인간의 경제는 모두 자기 조정 시장으로 재구성되게 된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상품의 시장은 동시적이고도 지구적으로 나타나야만 비로소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구빈법의 철폐, 금본위제의 시행, 곡물법 철폐를 통한 자유 무역 등과 같은 “신앙적” 행동이 취해지게 되며, 19세기 문명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유토피아적 행동이 현실에 실현되는 것을 사회라는 실체는 단 한순간도 견딜 수 없었다. 노동자들은 노동 조합과 정당을 만들어 저항했으며, 토지 세력은 보호 관세와 반동적 군국주의 공세 등을 통해 저항했으며, 심지어 자본주의적 기업들마저 중앙 은행을 통한 원활한 통화 및 신용 공급을 요구하며 저항했다. 폴라니가 말하는 “이중적 운동”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 이중적 운동이야말로 폴라니가 강조하는 시장 경제의 유토피아적 성격과 이에 맞서는 사회 실재의 발견이 표출되는 지점이다. 시장 경제가 나타나게 된 것은 자유 방임은 커녕 엄청난 국가 계획에 의한 것이었지만, 시장 경제에 맞선 사회의 자기 보호 운동은 아주 자발적 자생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달성 불능의 어거지 유토피아에 대해 사회라는 실체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자기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를 최초로 발견한 이라고 폴라니가 생각한 로버트 오웬의 생각처럼, 인간 존재의 핵심은 국가도 기계도 시장도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실제로 관계를 먲는 사회인 것이다. 그런데 이 실체인 사회는 시장이라는 유토피아에 의해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순적 상태에 처하게 된다. 한편으로 가혹하기 짝이 없는 시장 기율을 자기에게 채찍질하다가 너무 아프다며 요리 빼고 조리 뺀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는 또 자기에게 시장 기율의 채찍질을 더욱 가혹하게 하고, 또 요리 조리 뺀다...이 어처구니없는 “스미골과 골룸의 자작 2인극”이 계속되면 사회는 결국 붕괴하지 않을 수 없다. 붕괴의 긴장이 지구적 시장 자본주의를 휩싸게 된다.

17장-20장, 1장-2장: 이것으로 폴라니 당대에 목도하고 있는 19세기의 문명 붕괴와 그를 이은 거대한 전환 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 자유주의적 국내 정부, 자기 조정 시장, 국제 금본위제, 세력 균형 체제로 구성된 지구적 시장 자본주의는 곧 제국주의적 경쟁과 1차 대전의 파국을 맞는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의 변화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들의 세계가 19세기의 자기 조정 시장 체제라는 유토피아로 작동하고 있다고 믿는 자유주의자들은 1차 대전 이후에도 국제 연맹과 금본위제를 앞세워 19세기 문명을 재건하려는 헛된 노력에 몰두한다. 하지만 결과는 금본위제의 몰락과 함께 산사태와 같은 붕괴 및 전환의 물결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대중 민주주의를 장악한 반(反) 시장 세력과 산업을 장악한 자본가들이 사회의 정치와 경제를 한 쪽씩 찢어가면서 사회는 결국 가랑이가 찢어지고 만다.
21장: 이것이 19세기 이래로 서구 문명이 걸어온 파우스트적 몸부림의 자초지종이다. 이제 시장 경제라는 것을 구성하겠다는 유토피아적 사고 방식은 전지구적으로 힘을 잃어버렸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어떤 경제와 어떤 사회를 구성해야 할까. 과연 파시스트들처럼 산업 사회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사회를 기능적 구조로 완전히 재편하고 인간은 자신의 영혼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포기한 채 그 구조의 숫나사 암나사로 변해가야 할까. 아니면 이러한 끔찍한 결말을 피하기 위해 자유주의자들처럼 시장 경제에 대한 일체의 개입과 간섭을 거부하고 19세기 문명의 형태를 고집해야 할까.
폴라니의 대답은 다시 “자유”이다. 개인의 자유와 인간의 영혼은 분리할 수도 없고 포기할 수도 없는 본연의 모습이다. 이것을 여러 기능으로 나뉘어질 수밖에 없는 산업 사회라는 “복합 사회”와 양립 가능하게 하는 길은 무엇인가. 시장이라는 유토피아를 걷어내고 그 밑에 버티고 있는 실체, 지난 2세기 동안 한 순간도 그 유토피아에 길들여지지 않고 이중적 운동이라는 역동을 만들어냈던 사회라는 실체를 발견하고 그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는 이제 2천년전 예수의 복음서 이후로 새롭게 재정의되어야 할 순간이 왔다. 이것이 사회의 발견이며, 그 속에서 인간의 자유를 실현하는 사회주의가 인류의 나아갈 길이다.

[거대한 전환]은 즉각적인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1945년에 골란츠(Gollancz) 출판사에서 나온 영국판은 완전히 무반응에 싸여버렸으며, 1944년에 출간된 미국판도 비록 몇 군데 학술지에서 논평이 실리기는 하지만, 그 논지는 거의 이해되고 있지 못했으며 반응도 냉담한 편이었다. 비록 맥이버(McIver)와 같은 사회학의 거장은 즉각 이 저서의 심대한 중요성을 이해했지만, 이는 오히려 아주 예외적인 경우였던 것으로 보인다. 2차 대전 이후 다시 대서양 헌장의 정신으로 전후의 세계 자본주의를 재건하는 데에 바빴던 미국인들로서는 이 책의 논지가 반가울리 없었다. 게다가 곧이어 시작된 냉전의 상황은 정치경제 체제에 대한 사람들의 상상력을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극도로 단순화된 이분법으로 몰아넣어 버렸고, 이 저서의 섬세하고 복잡한 논지는 설 자리를 잃게 되었을 것이다.


3. 실체 경제학: 인간 사회에서의 경제의 위치

하지만 폴라니는 이러한 냉담한 반응에 굴하지 않고 [거대한 전환]에서 일단락된 시장 경제의 유토피아적 성격 그리고 사회 실재의 현실이라는 주제를 더욱 밀고 나가, 전 인류 역사의 모든 사회와 경제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 분석의 틀, 즉 “실체 경제학(substantive economics)”을 구성할 수 있는 범주와 이론을 마련하고 또 그에 근거한 실제의 역사적 인류학적 사회 조사 작업에 착수한다.
20년간의 “거대한 전환”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와 경제를 바라보는 19세기적인 경제주의의 편견은 조금도 약화되지 않았고, 오히려 마르크스주의 쪽이나 부르주아 사회 과학 쪽이나 훨씬 더 체계화되고 강화된다. 먼저 영국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모리스 돕(Maurice Dobb)의 [자본주의 발전 연구(Studies of Capitalist Development)]가 전후에 출간된다. 폴라니는 이 책이 마르크스 경제학의 긍정적 측면인 역사적 접근법을 완전히 무시하고, 노동 시장도 엄연히 존재하지 않았던 (그렇다면 노동력의 가치가 결정되지 않아 잉여 가치의 형성도 가치 법칙의 작동도  성립할 수 없다)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가치 법칙을 적용하는 경제주의적 시대 착오를 범했다고 격렬하게 비판한다. 그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자인 돕 또한 “하이에크나 미제스와 같은 적편에 나란히” 서게 되었다는 것이다.21) 한편 탈코트 파슨스와 닐 스멜서(Neil Smelser)는 자신들의 구조주의적 기능주의에 근거하여 경제를 나머지 사회와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보는 이론 체계를 구축한다. 즉, 사회란 자신의 존속과 발전을 위해 필요한 기능을 수행하는 하나의 “시스템”이며, 그 중 하나의 기능인 경제는 거기에 종속된 하나의 독자적 “하위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에서 순수하게 “경제적 합리성”으로 지배되는 “경제적 행동”의 영역을 명확하게 갈라내는 것이 가능하며, 그 영역은 이제 폴 사뮤엘슨(Paul Samuelson)의 [경제 분석의 기초(The Foundation of Economic Analysis)]에서 시장 경제의 일반 법칙으로 지배되는 무수한 경제 변수들의 방정식 시스템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22)
폴라니는 3년간의 미국 체류를 마치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오지만, 1947년 콜럼비아 대학교에 다시 자리를 얻어 또 다시 미국으로 이주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캐나다 토론토 근교의 피커링(Pickering)에 정착한다.23) 1953년에 폴라니는 퇴임하지만, 그는 이 대학의 역사학자, 인류학자, 사회학자, 경제학자들을 포괄하는 학제적 연구 프로젝트 팀을 구성하고 포드 재단에서 연구비를 얻어내는 데에 성공한다. 이 프로젝트가 1957년 연구 성과를 발표한 것이 [초기 제국에서의 교역과 시장(Trade and Market in the Early Empires)]이다.24)
폴라니가 이 책에 수록한 논문 [제도화된 과정으로서의 경제(Economy as Instituted Process)]는바로 그러한 실체 경제학을 수립하려는 야심적인 기획이 잘 드러나 있다. 자기 조정 시장 경제학이라는 시장 유토피아의 환상에 빠져 그 개념과 범주를 인류 역사에 존재한 다종다기한 사회에 마구잡이로 적용하게 된다면, 사회의 실체라 할 인간들의 사회적 관계에서 경제가 실제로 어떠한 과정으로 작동하며 그를 위한 제도화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라는 실체적 측면을 모조리 놓치게 된다. 따라서 먼저 폴라니는 경제라는 말에 서로 다른 두 개의 의미가 중첩되어 있음을 착목한다.25) 첫째는 실체적 정의로서, “인간이 자신이 필요로 하는 물적 수단을 조달하는 행위”이며, 둘째는 형식적(formal) 정의로서, “인간이 가장 알뜰한 선택을 하는 것 즉 경제화(economizing)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폴라니는 첫 번째의 정의는 실제 사회의 경제적 작동이라는 사실적 실체적 측면을 대상으로 삼는 정의인 반면, 후자는 순전히 비용 편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논리적 차원에서 도출된 것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실제 사회에서 경제가 작동하는 바를 알기 위해서는 첫 번째 정의에 기초한 경제 이론과 개념 범주를 설정해야 하며, 후자의 정의에 근거하여 구성된 시장 경제학의 이론과 개념 범주들은 오로지 시장 경제로 조직된 근대 자본주의의 경제 작동의 한 측면을 이해하기 위한 참고로만 사용해야 하고, 이외의 사회들에는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체적) 경제란 그러한 추상적 논리적 구성물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사회의 여러 구체적 제도를 통하여 조직되는 실제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 실체적 경제학의 이론틀에 기대어 폴라니는 인류 역사 전체에 걸쳐서 나타났던 유사 시장(pseudo-market)적 경제 행태의 패턴들의 사회적 성격을 규명하고 그것이 사실상 현대의 시장 경제와는 판이한 것임을 밝혀내는 작업을 인도한다.26) 이 책의 1부에 참여한 고대 사가들은 놀랍게도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역사가들이 지금까지 상정해왔던 시장 경제란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며, 아예 도시에 시장터(marketplace)조차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발표한다. 2부에 나오는 인류학적 연구에서는 여러 부족 사회에서의 시장의 존재 형태가 전혀 형식적 경제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임을 또한 보인다. 이 저서는 이후 고대 경제사 분야와 경제 인류학에서 큰 논쟁을 낳아, 두 분야의 연구가 소위 형식주의(formalism) 대 실체주의(substantivism) 학파의 논쟁이라는 두 개의 대안적 패러다임으로 분립되도록 만드는 성과를 낳는다. 폴라니는 이후에도 서아프리카의 다호메이 왕국과 고전 고대의 그리스 경제에 대해 독자적인 조사 연구를 수행하여 이렇게 실체적 경제가 실제 존재하는 사회적 관계에서 어떻게 구제적으로 제도화된 과정으로 자리잡고 또 시장 경제와의 접촉 혹은 변질을 겪어나가게 되는가를 연구한다.27)
폴라니는 만년에도 학문적 연구 이외에 정치적 사회적 활동을 활발히 한다. 1957년 고국인 헝가리에서 노동자 봉기가 일어났을 때에는 이를 정열적으로 지지하며 인간적 민주적 사회주의의 꿈을 키웠고, 혁명에 참여한 문인들의 시를 모아 영어로 번역하여 내기도 한다. 또 냉전과 핵무기 경쟁이 벌어지게 되자 버트란드 러셀, 아인시타인, 사하로프 등의 여러 인사들과 힘을 합쳐 [공존(Co-existence)]이라는 잡지를 준비하기도 한다. 1964년 서거한다. 부인 두친스카는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어느 헝가리 시인의 구절로 그가 일생 섬겼던 이름 모를 신에 대한 그의 사랑을 묘사하고 있다.

신이시여, 저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만약 당신이 길거리의 신문팔이 소년이라면
저는 소리높여 신문을 팔겠습니다


4. 맺으며: 시장 유토피아와 사회라는 실체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은 출간된 지 65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사회 과학 전반과 역사학에 있어서 중요한 고전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하지만 현재까지 이 저서가 회자되고 논의되는 방식을 보면 이 저서의 논지가 그 때 그 때 변하는 시대의 담론과 관심사라는 프리즘으로 굴곡되어 본래의 의도가 무시된 채 이해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다. [거대한 전환]을 주의깊게 읽지 않은 이들은 폴라니의 논지를 단지 “시장 경제의 비인간성에 대한 고발” 그리고 이를 막기 위한 “적절한 국가 개입과 규제의 필연성”을 설파하는 흔해빠진 명제로 왜곡 축소하여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19세기 초 생 시몽(St. Simon)과 시스몽디(Sismondi)가 시장 자본주의의 폐해와 모순을 최초로 고발한 이후, 전 세계적 규모의 시장 자본주의가 지난 200년간 인간과 자연과 사회를 어떻게 황폐화시켰는가를 고발한 중요한 저작과 논자들은 무수히 많이 찾을 수 있다. 그 저작과 논자의 길고 긴 목록 뒤에 그저 한 사람 덧붙이는 정도로 폴라니를 이해한다면 이는 [거대한 전환]의 핵심 논지와 그 새로움을 전혀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물론 시장 경제라는 제도가 인간과 사회와 자연에 파멸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 폴라니의 주장에 있어서 중요한 한 축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폴라니의 논지는 시장 경제의 비인간성이나 비합리성을 고발하려는 것에 있지 않다. 그의 주장은 시장 경제란 아예 “전혀 도달할 수 없는 적나라한 유토피아(stark utopia)”라는 것이다. 시장 경제라는 제도가 그토록 현실과 동떨어진 망상(妄想)에 불과한 것이기에,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 사회가 단 한시라도 그 이상에 수렴하여 형성되는 일이란 결코 벌어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시장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에 실제로 작동하는 법칙은 그래서 모든 시장들이 자율적으로 자체적인 균형을 찾아가는 자기 조정 시장의 정치경제학이 아니라, 그러한 유토피아를 어거지로 현실에 덧씌우는 무리한 폭력에서 사회를 보호하려는 노력이 자기 조정 시장과 충돌하면서 빚어내는 일대 소동 즉 “이중적 운동”의 정치경제학인 것이다. 
여기에 시장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정치경제학자로서의 폴라니의 시각의 새로움을 찾을 수 있다. 칼 마르크스는 시장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고발하고 그 작동 법칙의 내적 모순을 분석함으로써 그것을 아예 폐절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존 메이나드 케인즈는 시장 자본주의 특히 금융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인 운동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들어서 그것을 국가의 적절한 개입으로 조절하고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폴라니는 그보다 시장 경제란 현실에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며, 거기에 담겨 있는 인간, 자연, 화폐가 상품에 불과하다는 상품 허구는 단지 우리가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고 착각하는 일종의 상상이요 매트릭스일 뿐이라고 갈파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제시하는 해결책의 방향 또한 시장 경제를 폐절하거나 국가에 의한 적절한 개입 등으로 그저 규제하는 것이 아니다. 로버트 오언의 사상을 빌어 폴라니가 강조하고 강조하는 핵심은, 이제 우리가 사회라는 실체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국가도 시장도, 이 사회라는 실체가 필요로 하는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제도에 불과하다. 따라서 사회를 시장에 묻어버리려 하거나 국가에 묻어버리려하는 짓은 모두 인간의 자유와 이상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비극만 낳고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폴라니가 정치경제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사회 사상가로서 갖는 새로움이 있다. 올바른 방향은 사회라는 실체와 거기에 담겨 있는 인간의 자유와 가치와 이상을 틀어쥐고서, 국가와 시장이 그러한 목적에 복무할 수 있는 기능적 제도로서의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이 폴라니가 제시하는 사회 변혁의 방향이 될 것이다.
폴라니는 아마도 20세기의 끝무렵이 되어 다시 인간 만사와 세상 만물을 상품으로 바꾸어 상품 시장과 금융 시장을 전 지구적으로 그것도 19세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규모와 깊이와 강도로 벌이자는 소위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전 지구를 덮게 될 것임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분명히 자신의 시대에 “달성 불가능한 적나라한 유토피아”임이 밝혀졌다고 생각했던 시장 경제의 유토피아가 다시 한번 과학과 자유와 문명의 이름을 참칭하고 또 한번 인류의 의식을 옛날의 매트릭스로 다시 한번 뒤집어 씌우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심각한 금융 위기를 겪은 2009년의 오늘날 약 30년간 전 지구적으로 자행된 상품화(commodification)는 어쩌면 다시 한계에 봉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전 지구를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세계 경제의 조직 원리였던 금본위제가 하루 아침에 붕괴하고 그를 이어 거대한 전환의 급류가 터져나와 전 지구를 바꾸어 놓은 바 있다. 오늘날 지구적 경제의 조직 원리인 지구적 자본 시장의 자기 균형 원리는 지금 심한 의심과 불신을 받기 시작했으며, 어쩌면 이것이 다시 급격하게 무너지는 날 새로운 거대한 전환의 급류가 다시 터져나올 지도 모른다. 낙관도 비관도 절망도 희망도 쉽게 가지기 힘든 2009년 지구촌의 우리 - 어쩌면 폴라니의 이 저서는 동시대인들보다는 우리들에게 더욱 절실하게 읽히도록 쓰여진 책인지도 모른다. 시장 경제의 유토피아라는 매트릭스에서 깨어나 우리 이웃과 자연을 바로 보고 바로 끌어 안을 수 있는 사회 실체의 복원도 우리를 위해 그가 일생을 준비한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각주)-----------------
1) Ferenc Múcsi, "The Start of Karl Polanyi's Career" in K. Polanyi-Levit and M. Mendell ed., The Life and Work of Karl Polanyi (Montreal: Black Rose, 1990) 27p.
2) 그의 동생이었던 마이클 폴라니(Michael Polanyi)는 이러한 경향에서 더욱 나아간다. 유력한 노벨 화학상 후보자였고 (그의 아들 존 폴라니(John Polanyi)가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다) 이후 지식 문제를 연구하는 철학자로 전환했던 마이클은 일체의 사회주의 사상을 배격하고 칼 포퍼(Karl Popper)등과 나란히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자유주의 사회 사상의 입장을 견지하여 칼 폴라니와 사상적으로 차가운 관계에 섰다고 한다.
3) 갈릴레이 써클은 20세기 헝가리의 지성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페이지라고 한다. 회원은 2천명에 달했고 1년에 2천회 심지어 어떤 이의 추산으로는 1만회에 이르는 교습과 강연을 행하였다. 여기에 회원이었거나 관계를 맺은 유명한 지식인은 예술사가 아놀드 하우저, 철학자 루카치, 경제학자 칼도르, 음악가 바토크 등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4) 그의 아버지는 그 특유의 엄격한 도덕적 원칙에 따라서 기업의 청산 과정에 모든 소액 주주들에게 돈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고집하여 결국 자기 재산을 완전히 소진해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5) 그는 이때 “인간 고통과 불행의 사회적 근원”을 다룬 [대괴수(Behemoth)]라는 200페이지의 수고를 썼다고 하나 남아 있지 않다. 그가 20년대에 썼던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남아 있다. “(과거 6년간) 우리가 겪었던 고통이 전혀 끝난 것이 아니라는 점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괴로움과 아픔을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제거해내기 위해 그 기원을 쉴새없이 찾아내는 작업에 몰두해야 한다는 지상명령이 우리 앞에 있음은 너무나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기원을 인식하고 이해할 필요성은 아무도 생각하지도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의 제목으로 “우리 시대의 기원(The Origin of Our Times)”을 제안했었고, 이는 영국 출판본의 제목으로 올라간다. Kari Polanyi-Levitt, "The Origins and Significance of The Great Transformation" in The Life and Works of Karl Polanyi 119p. 
6) 그런데 폴라니가 단 하루 동안 공산주의자였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반동 쿠데타가 발발하여 혁명 정부가 전복되던 1919년 5월 2일 당시 병상에 누워 있었던 폴라니는 소식을 듣자 젊은 시절의 친구인 루카치 - 당시 혁명 정권의 교육 장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 에게 공산당 입당을 신청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두친스카는 회고하고 있다. Ilona Ducynska, "I First Met Karl Polanyi in 1920" in K. McRobbie et. al. ed, Karl Polanyi in Vienna: The Contemporary Significance of the Great Transformation (Montreal: Black Rose, 2000) 309p.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폴라니는 일생 동안 이렇게 애증이 섞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7) 피터 드러커의 회고록에 보면 당시 폴라니 가족의 생활의 한 단편이 재미나게 드러난다. 폴라니는 당시 [오스트리아 경제]에서 상당한 액수의 보수를 받았지만 집안 생활은 당장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빈곤하였는데, 그 수입을 모두 비엔나에 있는 헝가리 망명객들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드러커의 회고록은 몇 가지 점 - 사람 이름과 시간 등 -에서 부정확한 점이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8) 당시의 폴라니의 경제학 연구의 진전에 대한 중요한 정보는 Felix Schafer, "Vorgartenstrasse 203: Extracts from a Memoir" in Karl Polanyi in Vienna.
9) 이것이 폴라니가 “희소성의 개념이 없이 생산에 투입되는 노동 시간으로만 경제 이론을 구성하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이론으로서 기각한 이유이기도 하다.
10) 폴라니의 이 생각은 코올(G. D. H. Cole)의 ‘길드 사회주의(Guild Socialism)’에게서 큰 영감을 얻었다. 코올은 그의 다원주의적 국가이론에 근거하여 산업 민주주의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중앙 국가를 해체하고 생산자와 소비자의 다양한 조합 - 즉 ‘길드’ - 이 병존하는 체제로 산업 사회를 재편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11) Karl Polanyi, "Sozialistische Rechnungslegung" Archive für Sozialwissenschaft und Sozialpolitik Bd. 49: 377-418; "Die funktionelle Theorie der Gesellschaft und das Problem der sozialistischen Rechnungslegung" Archive für Sozialwissenschaft und Sozialpolitik, Bd. 52: 218-28; "Neue Erwägungen zu unsere Theorie und Praxis" Der Kampf Bd. 18: 18-25.[국역: “우리의 이론과 실천에 대한 몇 가지 반성” 홍기빈 편역,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책세상)] 또 구본우 [칼 폴라니의 경제계산 개념에 대한 연구] 한신대학교 사회복지학과 대학원 석사논문.
12) Schafer, op.cit. 337-8.
13) [거대한 전환]에 나타난 폴라니의 역동적이고 유려한 문어체 영어와 특히 수사학적인 재능과 능숙한 메타포의 사용 등은 [거대한 전환]을 하나의 문학 작품의 가치를 가지게 한다. 이에 대해서는 Kenneth McRobbie, "Literature and The Great Transformation" in Karl Polanyi in Vienna. 그런데 [거대한 전환]의 일역본의 역자들은 폴라니의 영어 문체를 혹평하면서 “영어와는 거리가 먼 외국인”이므로 어쩔 수 없다는 실로 황당한 지적을 하고 있고, 게다가 대우학술총서에서 나온 예전의 한국어본의 역자는 어이없게도 이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자신의 한국어판 역자 후기에 고스란히 옮겨놓고 있다. 이들은 차라리 페이지마다 눈에 걸리는 자신들 번역본의 오역과 졸역을 먼저 돌아보았어야 할 것이다. 
14) 여기에서 특기할만한 사실은 폴라니가 보았던 판본은 이 MEGA 본이 아니라 같은 해에 라이프찌히에서 2권으로 나누어 출간된 소위 란트슈트-마이어(Landshut-Mayer) 판이었는데, 이 판본에는 노동의 양도와 소외 개념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부분 (보통 “제 1초고”로 알려짐)이 실려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 부분을 폴라니가 따로 보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만약 보았다면 젊은 마르크스의 견해와 그에 대한 자신의 독해의 일치를 보고 기뻐했을 것이다. 
15) 미출간 강연 원고, “경제학-철학 수고 소개” 홍기빈 편역,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책세상)
16) 여기에서 많은 혼동을 낳는 지점으로서, 폴라니의 “허구적 상품”의 개념이 [자본론] 1권에 개진되고 있는 “상품 물신성” 개념과 다른 것이라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자 한다. 이미 폴라니 스스로가 이 책 6장의 각주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마르크스의 개념은 상품의 교환 가치가 사용 가치와 아무런 “자연적 연관”이 없이 상품들끼리 교환된다고 하는 독특한 사회적 관계의 형식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인 반면, 폴라니의 “허구적 상품”이란 본래 상품이 될 수 없는 사회적 존재들인 인간, 자연, 화폐가 상품이라는 허울을 둘러쓰게 되는 어불성설의 과정을 부각시키기 위한 개념이다.
17) 북구 신화의 전쟁의 신 오딘(Odin)
18) 미출간 강의 노트 “마르크스주의의 기독교적 관점: 비판”. 홍기빈 편역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책세상)에 수록. 폴라니의 미출간 유고와 각종 자료의 목록은 캐나다 몬트리올의 콘코디아(Concordia) 대학의 [칼 폴라니 정치경제 연구소(The Karl Polanyi Institute of Political Economy)]에 문의하면 구할 수 있다. 
19) "The Essence of Fascism", in J. Lewis, K. Polanyi, and D. K. Kitchin eds., Christianity and the Social Revolution (London: Gollancz, 1935) 369-70.
20) "Introduction" in The Life and Work of Karl Polanyi, 7p.
21) The Journal of Economic Hisotry 8(2), 1948 November, 206-7.
22) T. Parsons and N. Smelser, Economy and Society (Glenco, Ill.: Free Press, 1958)
23) 당시 매카시 광풍이 불고 있었던 미국 정부는 일로나 두친스카의 공산주의 활동 전력을 문제 삼아 입국을 거부한다. 폴라니는 피커링의 작은 집에서 1964년 서거할 때까지 살면서 뉴욕으로 기차를 통해 통근하였다.
24) Karl Polanyi, Conrad M. Arensberg, and Harry W. Pearson ed. Trade and Market in the Early Empires: Economies in History and Theory (New York: Free Press, 1957).
25) 폴라니가 이러한 경제의 두 개의 정의를 발견하게 된 중요한 영감으로 1923년에 출간된 칼 멩거(Carl Menger)의 [일반경제학원리]을 언급하고 있다. 주지하듯 칼 멩거는 오히려 시장 경제의 순수 이론을 개발한 선구자로서 이 형식적 경제학의 원조라 할만한 이이다. 하지만 멩거 자신도 이러한 경제에 대한 형식적 정의와 그에 기반한 이론이 인간 역사에 모두 적용되기 힘들다는 의심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이론을 담고 있는 1871년의 [국민경제학비판요강]을 절판시키고 번역도 모두 거부한 채 2판의 준비를 위해 몇 십년간의 연구에 착수한다. 그의 사후인 1923년에 출간된 2판은 일단 [일반경제학원리]라는 전혀 다른 제목을 달고 있었고, 인간의 욕구의 보편적 성격을 탐구한 장을 추가하는 등 큰 변화를 담고 있다고 한다. 폴라니에 의하면, 인간 경제의 실체적 정의가 본격적으로 개진된 저서가 바로 이 [일반경제학원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사후 멩거의 저서의 영역본이 준비되는 과정에서 하이에크와 나이트(Frank Night)는 이 2판을 전혀 무의미한 것이라고 폄하하고 1871년의 1판을 번역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2판은 [일반경제학원리]라는 제목으로 일본어로 번역되어 있다. 
26) 이는 그의 사후 피어슨(Harry Pearson)이 유고를 정리하여 편집한 [사람의 살림살이(The Livelihood of Man)]의 1부에 더욱 풍부하게 개진되어 있다. New York: Academic Press, 1977.
27) 그리스 경제에 대한 연구는 The Livelihood of Man 의 후반부를 보라. 또 다호메이 왕국에 대한 연구는 Dahomey and the Slave Trade: An Analysis of an Archaic Economy (Seatt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966)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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