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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자본주의 미래보고서: 빚으로 산 성장의 덫, 그 너머 희망을 찾아서
등록일 2018-04-24


자본주의 미래보고서:

빚으로 산 성장의 덫, 그 너머 희망을 찾아서

마루야마 슌이치, NHK 다큐멘터리 제작팀 지음; 김윤경 옮김

다산북스

 

추천의 말

자본주의 신화, 우리가 놓친 것들, 공유지 생산

홍기빈(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위기 앞에 선 자본주의

 

1990년대는 번지르르한 자기만족complacency’의 시대였다. 사십 몇 년의 냉전 기간 동안 공산주의와 경쟁을 벌였던 자본주의는 마침내 최후의 승자가 되었고, 산업사회를 조직할 수 있는 유일한 또 최선의 사회 체제라고 스스로를 선언하였다. 이에 심지어 역사의 종말이 선언되기도 하였고, 지구 위의 만사 만물이 자본주의의 규칙에 따라 평정되는 것이 미래라는 비전을 담은 지구는 평평하다는 어구가 회자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명제는 이러한 사이비 철학자나 저널리스트들의 선정적인 주장 이외에도 대단히 정교한 자기 합리화의 논리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 여러 기둥들 중에서도 가장 중심에 있었던 가장 중요한 굵은 기둥은 말할 것도 없이 경제학이었다. 모든 인간은 이기적일 뿐만 아니라 모든 정보를 동원하여 자신의 최상의 선택을 완벽하게 계산해 낼 줄 아는 존재이며, 이러한 이들의 행동의 총합으로 나타나는 시장의 운동은 항상 스스로의 균형을 찾아가는 언제나 옳은 존재이며, 그러한 시장의 운동을 통하여 경제성장을 이룰 때에만 자본축적과 완전고용이 모두 가능해지면서 인간 세상에 평화와 진보가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을 펼치던 이들은 2018년 시점의 세계 자본주의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차피 프로퍼갠더에 더 가까웠던 역사의 종말이니 지구는 평평하다이니 하는 말들은 그렇다 치고, 전 세계 대학의 경제학과를 완전히 통일시켜서 절대불변의 진리처럼 위의 명제를 반복해 온 현대 경제학은 어떤 대답을 하고 있을까? 충실한 신고전파 경제학자라고 보이는 야스다 요스케 교수가 서문에서 솔직히 말하고 있듯이, 최소한 완전한 오리무중에 빠져있는 상태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는 90년대 공산주의의 몰락 이상으로 극적이다. 사실 공산주의의 이론적 실천적 파산이라는 것은 이미 그 오래 전부터 무수히 분석되고 예견된 것이었는지라 실제 몰락이 벌어졌을 때에도 많은 이들은 올 것이 왔다라는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공산주의를 누른 지구적 자본주의가 인류 역사의 최후 승자임을 선언한 지 채 20년이 못 되어 심각한 위기로 들어서게 된 것은 예견한 이들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무슨 체제 경쟁에서 패배한 것도 아니라 스스로의 자체 모순으로 스스로 무너진 일종의 내파implosion였으므로, 현재와 같은 대침체Great Recession’의 상태가 얼마나 계속될지 그 이후에 무엇이 나타날지도 종잡을 수가 없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20세기 끝 무렵 전 인류의 의식을 지배하다시피 했던 그러한 자본주의에 대한 믿음을 차분히 분석해 보고, 그것 때문에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과 잃을 것들이 무엇이었는지를 되돌이켜 보는 일이다. 그러한 자본주의에 대한 믿음은 지난 300년의 서구 지성사에서 서로 다른 시기와 맥락에서 생겨난 세 가지 신화가 역사적으로 누적된 서사narrative’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세 가지 신화가 짧은 시간 동안 압축적으로 합쳐져서 사회 전체의 의식을 짓눌렀던 대한민국에서 그 폐해는 몹시 심각하였다. 그 결과 우리는 좋은 삶으로서의 경제, 여러 사회적 가치, 기술 발전이 함축하는 여러 가능성과 진정한 의미에서의 경제 성장 및 풍요의 가능성을 보지 못하고 잃어버리게 되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서사를 분석해 보면 세 가지의 신화가 주요한 기둥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신화, 시장의 자기조정의 신화, 경제성장을 통한 개인과 사회의 행복이라는 신화가 그것들이다. 이 세 가지 모두 비록 과학의 외피를 둘러쓰고 있으며 대단히 장황하고 정교한 수학적 논증의 방식으로 하나의 과학적 법칙과 같은 형식으로 제시되고 있지만, 지성사적으로 돌이켜보면 서로 상당히 상이한 시간적 역사적 맥락에서 생겨난 담론들, 사실상 이렇다 할 과학적 근거가 없는 신화myth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를 만든 세 가지 신화의 기원

 

경제적 인간, 즉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신화는 대략 18세기 초에서 19세기 말에 이르는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되었지만, 그 핵심을 이루는 두 요소인 개인적 이기주의와 계산적 합리주의는 각각 일찍이 18세기의 영국과 프랑스의 계몽주의 시기를 전후하여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적 형이상학적 인간관과 거기에서 도출된 봉건적 도덕과 질서에 대한 반작용은 이미 르네상스 때부터 나타나고 있다. 자기 개인의 욕심을 좇아 부를 축적하는 개인의 행태에 대해 카톨릭 교회의 입장은 대단히 비판적이었지만, 이미 15세기의 북부 이탈리아의 파촐리니 같은 이의 저작에서 그러한 개인은 비난의 대상이기는커녕 사회에 풍요와 활기를 불어넣는 진정한 원동력이라는 사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는 16세기 튜더 왕조 영국의 토머스 스미스 같은 이의 저작에서도 나타난다. 17세기에 들어오면 사회 즉 정치체body politic 자체가 이렇게 자기이익을 좇아 뛰어다니는 원자 알갱이 같은 개개인들의 계약으로 성립된 것이라는 생각이 토머스 홉스 등의 사회계약설로 모습을 보이고 있다. 18세기 초가 되면 맨더빌 박사의 유명한 풍자시인 [꿀벌의 우화]가 영국과 유럽의 식자들 사이에 널리 읽히면서, 이제 이기적 개인이란 단순히 시민권을 얻은 정도가 아니라 인간의 가장 자연적인 본연의 모습, 즉 인간 본성human nature의 본질로서 치받들어진다.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구성하는 또 다른 요소인 계산적 합리주의는 19세기 초 제러미 벤덤 등의 철학적 급진파들의 손에서 보편적인 세계관으로 확립된다. 인간이 이기적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이기심을 계산적 합리성에 기초하여 추구하는 점에서 다른 동물과 다르다는 점은 물론 이전의 홉스나 아담 스미스 등의 저작에서도 충분히 강조되었던 점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 계산적 합리성은 여러 다른 종류의 인간사에 따라 다르게 작동하게 마련이기에 (예를 들어 연애 관계에서의 계산적 합리성과 내세의 구원을 내다보고 헌금을 바치는 계산적 합리성은 사뭇 달라 보인다), 이를 인간 행동의 보편적인 원리로 내세우기는 힘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벤덤이라는 실로 급진적인철학자의 손에서 인간 세상의 만사만물은 모두 쓸모 혹은 효용utility’ 즉 쾌락과 고통이라는 요소로 환원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 정확한 양을 측량하고 계산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명제가 제시된다. 요컨대 그의 말처럼 시나 압핀이나우리에게 고통과 쾌락을 주는 물건이라는 점에서는 아무 차이도 없으며 따라서 동렬에 놓고서 가치를 계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서 인간 세상의 만사만물은 파편화된 개인의 자기이익에 어느 만큼 도움이 되느냐라는 하나의 원리에 따라 가치와 가격이 매겨지는 것이 옳다는 신화가 생겨난다.

두 번째 신화는 시장의 자기 조정이다. 이 또한 근대 초기 유럽인들의 정신적 위기를 근원으로 삼고 있으며, 이 위기에 대해 18세기라는 고전주의 시대에 고안된 기묘한 해법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래서 노벨 기념 스웨덴 중앙은행상 수상자인 군나르 뮈르달Gunnar Myrdal은 시장의 자기 조정에 대해 ‘18세기 유럽인들의 미신이라고 말한 바 있었다. 종교개혁의 진통을 앓고 난 17세기 이후의 유럽인들은 신을 이신론deism과 범신론pantheism에 경도되었고, 신을 인격체가 아닌 자연Nature의 작동 원리 속에 내재한 하나의 섭리Providence로 이해하는 이성주의의 입장에 서게 되었다. 요컨대, 이 우주도 또 인간 세상도 신이 계획해 놓은 섭리 즉 메커니즘에 따라 작동하는 기계Machine일 뿐이라는 것이 그 시대를 풍미한 관점이었다. 시장의 자기 조정의 아이디어를 처음으로 제시했던 아담 스미스나 프랑스의 중농주의자들Physiocrats’이나 그러한 지적인 맥락에서 나온 이들이었다. 자기이익의 계산밖에 모르는 탐욕스런 개인들을 모아 놓아도 그 안에 하나의 질서와 섭리가 내재하고 있으므로 최종적으로는 최선의 결과가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은 18세기인들의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는 것이 지성사의 진실이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19세기 이후 오늘날까지의 경제 사상사에서 계속 더 정교화된 논리로 발전한다. 아담 스미스의 프랑스 쪽 해설가였던 세는 수요와 공급은 정확히 똑같은 양으로 서로를 창출하게 되어있다는 세의 법칙을 만들었으며, 19세기 말에 가면 한 쪽에서는 일반균형의 개념을 앞세운 로잔느 학파가 다른 쪽에서는 상품 세계의 자기 조절을 내세운 오스트리아 학파가 이를 복잡한 수식과 정교한 논리로 다듬은 바 있고, 이에 시장이라는 것은 다른 물리학적인 계system와 마찬가지로 평형equilibrium’의 메커니즘을 안에 품은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세 번째 신화는 경제 성장이다. 인구만 계속 불어나 준다면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자연적 요소만 유지되어 준다면 GDP로 측량된 바의 경제의 총량은 영원히 불어나게 되어 있으며, 뿐만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최대의 후생welfare’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최상의 또 유일한 방법이므로 마땅히 이것이 산업 사회를 조직하는 최고의 핵심 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19세기만 해도 이 성장이라는 개념은 경제학과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관심사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더욱 강조되었던 것은 절약을 통한 자본축적이었다. 이는 리카도나 존 스튜어트 밀 등의 고전파 경제학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인간 세상은 인구의 팽창이든 열등지의 개간이든 어쨌든 인간적 자연적 요소의 희소성이라는 장벽을 만나 침체하게 되어 있으므로 이를 최대한 지연시키고 또 뚫고 나가기 위해서는 절약을 통한 자본 측적과 그를 통한 노동 생산성을 올리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1930년대의 대공황을 거치면서 경제 성장은 그렇게 아득하고 먼 시간 지평의 문제가 아니라 당장 매년 아니 매일의 가장 뜨거운 관심사로 올라서게 된다. 자본주의는 자본과 노동이라는 적대적인 양대 계급의 공존을 본질로 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당시의 상식이었다. 자본은 자본 축적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노동은 최소한 완전고용과 임금 상승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는 바, 이 두 개의 모순된 목표의 정면 충돌이 산업의 작동을 정지 상태로 몰아넣었으며 그 결과가 대공황이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 막다른 골목을 뚫기 위해 전쟁이나 제국주의 팽창 등이 시도되었지만, 2차 대전 이후에는 지속적인 경제 성장 만이 이 둘 모두를 달성할 수 있는 유일의 대책이라는 전 지구적인 합의에 도달한다. 자본가들도 행복하면서 또 일자리도 계속 창출되며 커진 파이의 일부를 복지로 돌려 모두가 행복한 산업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첩경이자 유일의 길은 바로 경제 성장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경제 성장은 하나의 새로운 지상명령imperative의 자리로 올라선다.

따지고 보면 이 세 가지의 신화는 근본적으로 따져볼 때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며 함께 연결될 아무런 필연성이 없다. 이기적 개인들의 계산적인 행동이 자기 조정적이며 최상의 사회적 결과를 가져온다는 주장은 오로지 파레토가 구상해 놓은 가상의 사고 실험에서만 벌어지는 일일 뿐, 그것이 여러 형태의 독점이나 지배 심지어 전쟁과 파괴 등을 낳게 될 경우엔 전혀 성립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시장이 설령 자기 조정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영원히 성장할 수 있으며 성장이 최선의 인간선이라는 것 또한 19세기의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이 들으면 대단히 의심스러워 할 이야기이다. 또 경제의 성장이라는 것이 과연 합리적 개인들과 시장의 메커니즘과 한짝인지도 아주 의심스럽다. ‘출산 파업이 경제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보라. 저성장 기조에도 불구하고 펄펄 끓고 있는 각국의 자산 시장의 상태를 보라.

 

신화는 과학이 아니다

 

한 걸음 나아가, 이 세 가지의 주장들 자체가 과연 21세기의 과학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들인지 아니면 전혀 그렇지 못한 신화로 판명 났는지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내가 아는 바로, 19세기까지도 유럽의 많은 지식인들이 자명한 진리로 여겼던 호모 이코노미쿠스라는 인간 본성은 그 이후의 철학과 심리학과 인류학에서 철저히 논박당한 바 있으며, 최소한 이를 자명한 진리라고 여기는 이는 없다. 시장이 과연 자기 조정 기능을 가지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칼 폴라니 등의 19세기 이후의 유럽 사회사 연구로 또 케인스와 뮈르달 등의 경제학 연구로 철저하게 논파당한 바 있으며, 본문의 스티글리츠의 유명한 말처럼 보이지 않는 손이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21세기의 상식이 되고 있다.

특히 경제 성장의 신화는 과학적 사실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도덕적 당위적 차원에서도 근본적인 도전에 부닥치고 있다. 우선 영구적인 경제 성장이 객관적으로 가능한 것인가? 이른바 성장의 한계는 여러 차원에서 논의되어왔다. 가장 잘 알려진 자연적 환경적 한계뿐만 아니라 사회적 인간적 한계도 점차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영원히 이루어지는 경제 성장이란 그에 상응하는 인적 물적 자원의 충분한 공급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이는 인구의 지속적인 증가 그리고 핵심적인 천연 자원의 무제한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경제 성장이라는 엔진이 작동하는 틀이 되는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제도 장치 또한 동일한 조건으로 머물러 줄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전제들이 실제의 현실과 터무니없이 빗나간 것이라는 사실은 21세기에 들어 갈수록 명확해지고 있다. 생태적 한계는 물론이며, 인구 증가율의 정체 혹은 감소는 거의 모든 산업국가에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며, 경제 성장에 수반되는 불평등과 실업으로 인해 사회 갈등이 심해지면서 사회적 정치적 합의 자체가 거대한 이동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과연 60년대와 같은 성장률은 고사하고, 4% 정도의 소박한 수준의 성장률이라도 지속할 수 있는 나라가 얼마나 될지는 누구도 확언할 수 없는 바이다.

둘째, 설령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영원한 경제 성장은 과연 바람직한 가치인가? 자연과 환경은 생산의 투입 요소로 전락하고, 인간은 그저 끊임없이 노동하고 끊임없이 소비하는 두 가지 활동으로만 인생을 채워야 하며,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물의 갈수록 더 많은 부분은 자본으로 축적되어야만 한다. 자연이 파괴되고, 인간은 황폐화되고, 사회는 구역질날 정도의 불평등과 부패와 불안정성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추구해야 할 좋은 사회와 건전한 정신의 경제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가 잃어버린 희망의 가능성

 

그 대신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이 세 개의 신화를 기둥으로 하여 떠받쳐지는 20세기 끝무렵의 자본주의가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게 되는 바람에 우리가 보지 못하게 되고 또 갖지 못하게 된 좋은 것들이다. 첫째는 진정한 의미의 좋은 삶이다. 경제란 본래 좋은 삶을 위한 살림살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오이코노미아oikonomia’에서 나온 말이며, ‘획득의 기술chromatistike’는 어디까지나 그러한 좋은 삶에 필요한 수단들을 조달하는 하부 기술에 불과하였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의 경제 생활을 제대로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좋은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하며, 그것을 실현하는 데에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느 만큼이나 필요한지를 알아야 하며, 그것들을 어떻게 조달할지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경제를 돈벌이 활동 및 소비 활동과 동일시하는 현재의 경제 시스템에서 이렇게 우리의 본래적 의미에서의 좋은 삶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도모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토의하고 실행할 수 있는 여지는 빼앗기게 되었다. 사람들은 좋은 삶이라는 것을 많이 벌어서 많이 쓰는 삶과 동일한 의미로 여기게 되었다.

둘째, 개인의 돈벌이와 사회 전체의 경제 성장과 무관하거나 거리가 멀어 보이는 모든 개인적 집단적 가치들은 무시되거나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민주주의, 사회적 연대, 사회적 존엄과 화해 등등 이러한 경제적 계산 앞에서 날아가 버린 공공의 가치들의 가짓수는 일일이 다 열거할 수도 없을 정도이다.

셋째, 참으로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산업 혁명과 기술 혁신이 가지고 있는 무한정의 잠재적 생산성이 억눌리게 되었다. 오래 전에 토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이 갈파한 바 있듯이, 자본주의 영리 활동은 결코 기술적 생산성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후자가 이윤 창출에 도움이 된다면 물론 적극적인 투자와 생산 조직으로 나아가겠지만, 그렇지 않거나 오히려 반대라고 한다면 영리 활동은 기술적 생산성을 억누르거나 심지어 파괴하기까지 한다 (베블런은 그래서 이를 사보타쥬sabotage’라고 불렀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이라고 불리우는 오늘날에도 이러한 현상은 보이고 있다. 여러 혁신적 기술을 통하여 사회적 관계와 생산적 관계를 완전히 새롭게 조직하는 일이 잠재적으로 가능해졌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주요 대기업의 이윤을 창출하는 한에서만 실현되고 있고 또 그러한 방식으로 변형되어 이루어지고 있다. 그 결과 사회와 경제의 전면적 재조직이 가져올 수 있는 새로운 일자리 창출의 무한한 가능성은 짓눌리고 있으며, 세계 도처에서 특히 산업 기술 전환이 더 많이 진행된 나라일수록 언제 잘릴 지 모르고 노동 시간과 조건도 불규칙하기 짝이 없는 월급 150만원짜리 프레카리아트만 무수히 양산되고 있다.

 

이제 새로운 시스템을 상상하자

 

이 책에서 독자들이 접하게 될 세 사람의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내용을 풍부하고도 절절하게 자신들의 학문적 연구와 현장에서의 경험을 통하여 전달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의 20세기 자본주의, 이기적 계산적 개인을 규범으로 삼는 인간관, 시장에 자기 조정에 대한 맹신, GDP로 측정되는 바의 경제 성장을 지상명령으로 삼는 태도는 모두 과학적으로 파탄난 이론에 기반한 시대에 뒤떨어진 패러다임이라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이야기이다.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와의 경쟁에서 승리했지만 이제 그 뒤를 이어 20세기라는 과거의 역사 속으로 저물어 가고 있다. 더 이상 산업 사회를 조직하는 방식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두 가지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그릇된 이분법에 갇혀서도 아니 되며 그럴 이유도 없다. 새로운 기술적 사회적 조건에 맞는 새로운 시대의 경제 시스템을 상상하면서 현존하는 바의 결함 투성이 자본주의를 과감하게 바꾸고 개혁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이 세 사람의 공통된 이야기이다.

공산주의도 또 20세기 끝무렵의 자본주의도 아닌 그러한 새로운 경제 시스템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아직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은 미래에 대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으나, 앞에서 열거했던 바 우리가 놓치고 또 망각해 온 세 가지 문제들을 충분히 고려하고 대응하는 것이 되어야 함은 분명하다. 아주 추상적이지만 시사점을 주는 용어로 이야기하자면, 협력과 공유를 본성으로 삼는 새로운 경제적 인간이 출현하여 모두가 함께 소유하고 사용하는 공유재산commons을 주요한 거점으로 삼아서 새롭게 재구성된 경제 체제가 그 방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추상적인 단어들로 구체적인 답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그 단어들의 구체적인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도 또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다 읽고서 마지막 책장을 덮은 이들에게 촉구하고 있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기반한 경제학의 구성과 그에 기반한 새로운 경제적 실천과 관행과 제도의 창출은 우리 스스로가 손발을 움직여서 채워 나가야 할 작업이라고. 1차 산업혁명과 2차 산업혁명의 귀결로 사회 전체가 상전벽해의 대변화를 거쳐야 했던 19세기 초반에도 또 20세기 중반에도 그러한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고, 수많은 싸움과 심지어 숱한 인명의 살상과 희생까지도 수반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21세기에는 다를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한다. 이미 현존하는 바의 자본주의는 2000년대 후반 이후 심각한 내파를 겪었고, 일본의 공영방송이 제작한 프로그램에 기초한 이 책의 내용에서 보듯, 그에 대한 진지하고 근본적인 회의와 성찰도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을 이해하고 공감한 이들이 더 많이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힘을 모은다면, 19세기와 20세기와 같은 심한 고통과 경련을 얼마든지 지혜롭게 피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불과 50년 아니 20년 동안 위에 열거한 세 가지의 낡은 신화로 구성된 경제적 사고방식으로 집단적인 세뇌를 당해야 했던 고도성장의 신화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더더욱 절실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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